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4일 호주 시드니에서 양국 장관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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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장관이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에서 탈퇴한 지 하루 만에 아시아 지역에 지상발사형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의향을 밝혔다. 미국의 INF 탈퇴가 러시아의 조약 위반에 따른 것이지만, INF에 구속되지 않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란 속내를 드러낸 셈이다. 미중 간 무역 전쟁에 이어 군사적 군비 경쟁까지 가속화할 수 있어 한국과 일본 등 동북아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따라 과거 미국과 소련 간 핵 군축 협정을 대체할 다자 군축 조약의 필요성도 커지는 상황이다.
아시아 순방 일환으로 호주를 방문한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은 3일(현지시간) ‘지상발사형 중거리 미사일의 아시아 배치를 검토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은 그간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 모함과 전략 폭격기, 핵추진 잠수함 등을 활용해 왔으나 INF가 금지했던 지상발사형 탄도ㆍ순항미사일의 족쇄가 풀리면서 육지에 이를 전진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다만 "재래식 무기를 얘기하는 것"이라며 핵탄두 탑재 미사일 배치는 아니라는 뜻을 밝혔다. ‘군비 경쟁 우려’에 대해서도 그는 “전통적 군비 경쟁은 핵의 맥락인데, 우리는 핵 탄두를 탑재한 INF 사거리의 무기를 구축할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튿날 그는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겨냥해 “우리는 공격적이고 (역내) 불안정을 초래하는 중국의 행동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혀 사실상 중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 성격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에스퍼 장관은 배치 시점과 관련해 "몇 달 내를 선호하지만 이런 일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고, 배치 지역과 관련해선 동맹과의 논의 등에 달려 있다며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은 이론적으로 감추기 쉽고 이동식인 재래식 미사일을 괌 같은 지역에 배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고 AFP 통신은 태평양의 섬들과 동맹이 관할하는 지역이 될 수 있다고 관측했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를 인용해 한국과 일본을 거론하면서 특히 일본을 유력한 곳으로 꼽았으나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일본이 이를 주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우리 국방부 당국자는 9일 방한하는 에스퍼 장관이 지상발사형 중거리 미사일 배치 지역 의제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취지를 밝히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문제도 있었는데 한국 배치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1987년 미소가 체결한 INF 조약은 500㎞~5,500㎞의 사거리를 가진 지상발사 탄도ㆍ순항미사일의 생산, 시험, 배치를 전면 금지한 조약이다.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수를 제한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과 함께 냉전시대 핵 군비 경쟁을 종식시킨 것으로 평가되는 양대 군축 협정이다.
미국은 그러나 러시아가 INF 조약을 위반해 미사일을 실전 배치했다는 이유로 탈퇴 수순을 밟아 지난 2일 공식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START를 갱신한 미ㆍ러 간 신(新)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의 연장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보여 핵 군비 경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탈퇴 배경에는 과거 미소 간 군축 협정에 중국은 빠져 있어 중국의 군비 확충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INF 조약에서 벗어난 중국이 미사일을 마음껏 생산 배치한다고 불만을 토로해 왔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까지 포함한 다자 군축 조약 체결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일 INF를 대체할 새로운 조약과 관련해 “우리는 분명히 어느 시점에 중국도 포함시키길 원한다”고 밝혔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이날 성명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의 동참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장쥔(張軍) 유엔주재 중국 대사는 “미국과 러시아가 전 세계에서 가장 핵무기를 많이 보유한 나라인데, 어떻게 중국이 이 두 국가와 함께 놓일 수 있겠느냐”며 “미국이 중국을 INF 탈퇴 명분으로 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군축 조약에 합의하기까지는 험로가 예상돼 미중 간 군사적 긴장 고조로 동북아 일대에도 파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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