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가 나오는 영화 <박열>의 한 장면(위 사진)과 경북 문경의 박열 의사 선영에 안장된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운데). 가네코 후미코의 생전 사진. 박열의사기념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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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세우고 자신의 생활을 개척하려는 자에게는, 특히 공부로 뜻을 세우려는 자에게는 도쿄만큼 매력적인 유혹은 없다. (…) 아, 동경했던 도쿄여, 너는 나에게 내가 바라는 나 자신의 진정한 생활을 줄 것인가. 나는 믿는다.”
17살 때 집에서 쫓겨나 무적자로
조선 도착 후 ‘3·1운동’ 보고 감동
귀향 후엔 부친과 갈등으로 가출
1920년 봄, 열일곱 살의 가네코 후미코는 “차비 10엔이 전부”였지만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도쿄로 갑니다.” 사실 아버지가 딸을 쫓아냈다. “너 같은 불효녀랑은 못 산다.” 아버지는 가네코 후미코의 “머리채를 잡고 방 안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아버지는 호적에 딸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술 마시고 노름하는 게 전부였다.”
1903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무적자로 자랐다. “학교 갈 나이에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일본이 근대국가의 체제를 완비하고 문명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었던 때였다. “메이지 초기 교육령이 발포되어 산간 오지까지 학교가 세워지고 사람의 자식이라면 누구나 정신적, 육체적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남녀를 불문하고 만 일곱 살이 되는 4월부터 국가가 강제적으로 의무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인민은 모두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과연 “사람의 자식”인지 자문했다. 언젠가 “인민”의 한 사람이 될 수는 있을까? ‘국가’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무적자로 태어난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살 곳조차 없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결국 1912년에 조선에서 살고 있는 고모 집을 찾아가 식모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충북 청원 부강리의 부강고등소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무적자라는 이유로 늘 차별을 당했다. 많이 서러웠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1919년 조선을 떠나기 전 가네코 후미코는 3·1운동을 목격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독립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위엄을 느꼈다.
1919년 4월, 가네코 후미코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늙은 친척에게 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기려 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결혼을 빙자한 인신매매를 거부했고,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떠나기로 결심한다. 무엇보다 도쿄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 생활을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은 나날이 강해졌다.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덕에 나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는 마음으로 “과거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가네코 후미코는 “아버지여, 안녕”을 외쳤다.
도쿄에 도착하자 가네코 후미코에게 “미개척의 대광야”가 펼쳐졌다. “미싱이라도 배워 건실한 상인에게 시집가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세상의 중심이다. 어설프게 공부해서는 출세 못한다”는 말들이 쏟아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선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목표도 분명했다. “나는 영어, 수학, 한문 세 과목을 전문으로 배워 여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본 뒤 여자의전(女子醫專)에 진학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았다. 그래도 “희망이 그 고통을 극복하고도 남았다”.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도쿄의 고학생들은 무엇이 자신들의 삶을 견딜 만하게 하는지 진지하게 탐색했다. 1921년 출간된 데구치 기소의 <도쿄의 고학생>이 판을 거듭하며 사랑을 받던 시기였다.
호기심 많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다양한 집회”에도 참여했다. ‘불교제세군’ ‘사회주의자 그룹’ ‘기독교구세군’의 “설교”를 들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모두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관되게 “나 자신의 참된 만족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탐문했다. 자연스럽게 아나키즘에 경도되고 있었다. 때마침 동지들이 나타났다. 신문 판매로만 생계가 유지되지 않아 인력거꾼,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며 노점상에서 비누를 팔기도 했던 가네코 후미코는 ‘오뎅’ 요리집에서 일을 하며 “학교의 월사금과 전차비”를 벌었다.
그 가게는 “신문기자라든가 사회주의자라든가 회사원이라든가 문인 등 사회의 일부 인텔리들이 단골로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야간학교에서도 “여자 친구를 한 명 발견했다. 니야마 하쓰요상이 그 사람이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그 친구에게 “베르그송이나 스펜서나 헤겔 등의 사상 일반”은 물론이고,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 등을 소개받는다. <노동자 세이료프>와 <죽음의 전야>를 읽으면서 전율을 느꼈다. 가네코 후미코는 줄기차게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상을 만났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과 잡지를 샅샅이 찾아 읽었다. 조선 유학생들이 펴내는 잡지에도 관심을 가졌다.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또 한 번 급류를 탄다. 자신이 “개척”한 운명이었다.
고학생일 때 무정부주의에 심취
‘박열의 시’ 읽고 얼마 뒤엔 동거
‘흑도’ 창간, 사상운동 자금도 모아
1922년 2월,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 유학생 정우영이 건넨 ‘청년조선’ 잡지에서 박열의 시를 읽게 되었다. “시에서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반역 기분”을 느낀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가 할 일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그러니까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만약 있다면 나는 당신과 단지 동지로서만 교제해도 상관없습니다만.” 박열은 “저는 혼잡니다”라고 답했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으로서 상대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박열은 “일본의 권력 계급”에 “반감”을 가지고 있을 뿐, “당신같이 아무 편견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친밀감까지” 느낀다고 고백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살기로 결정하면서 세 가지를 굳게 약속한다. 첫째 “동지로서 함께할 것”, 둘째 가네코 후미코를 “여성으로 차별하지 않을 것”, 셋째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
1922년 7월, 두 사람은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를 창간했고, 연이어 <불령선인(不逞鮮人)>을 펴냈다. 박열은 특별 감시 대상자가 되었다. 잡지 발간과 사상운동을 위해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인삼상”으로 나섰다. “마시자 마시자, 만인이 두루 아는 영약 조선인삼을-자본가도 노동자도 정치가도-, 품질 확실 효능 보증”을 외치며 가네코 후미코는 운동자금을 모았다.
‘천황 암살 모의’ 조작해 사형 선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석 달 뒤
목숨 끊어 ‘천황의 은사’에 저항도
흑도회는 “문호를 개방”하고 “모두 각자가 결정할 바”를 존중하는 아나키스트들의 모임이었지만, 단숨에 “반역” 단체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지진마저도 그들의 탓이었다. 1923년 9월1일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자 군경과 자경단은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대역죄”를 씌웠다. 천황 암살 모의를 이유로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3년에 걸쳐 만들어진 사건이었다.
사형수 가네코 후미코는 남은 시간을 “자서전인 듯한 글을 쓰는 데 열중하여 거의 휴식도 운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원고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가까운 시일 안에 형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출판되어 하나라도 내게 공명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나의 시작부터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이 세상의 절멸과 나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쿠보쿠의 시를 잊지 않았다. “핑계대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1926년 4월 가네코 후미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석 달 뒤 자살로 천황의 ‘은사’에 저항했다.
1931년 7월, “사후 5주년을 맞아”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가 출간되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공명”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무적자, 고학생으로 “고심참담”의 세월을 거친 끝에 사상가, 출판인, 문학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가네코 후미코는 “내가 바라는 나 자신의 진정한 생활”을 쟁취했다. 글 쓰는 여자는 자신의 뜻을 이룬다.
■ 필자 장영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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