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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퇴직 후 먼 길 가야 하는데…배낭 속에 꼭 챙겨야 할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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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38)

중앙일보

우리는 은퇴 후에 먼 길을 걸어가야 한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다 챙기려 하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먼 길을 갈 수는 없다. 당장 가방에 챙겨야 할 소품은 무엇일까?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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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무인도에 갈 때 뭘 가져갈래?”하는 질문이 유행했다. 요즘 로빈슨 크루소처럼 갑자기 뚝 떨어져 세상과 차단되는 무인도가 있겠나 싶지만 일상의 수많은 사물 가운데 생활에 원초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따져보는 게 재미있었다.

남보다 몇 년 먼저 일을 접은 ‘은퇴 선배’로서 현역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퇴직할 때 뭘 챙겨 나올 건가요?” “뭘 챙기긴? 뻔한 퇴직금 몇 푼밖에 더 있어?” 그렇다면 할 말 없다. 그렇지만 재산, 새 직업, 건강 같은 커다란 하드웨어가 아니라 자유의 삶을 더 여유롭고 평화롭게 해줄 ‘소품’ 가운데 미리 챙기라고 권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

우선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이건 내겐 좀 어렵고 맞지 않는다) 같은 SNS 계정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많이 구축해야 한다. 퇴직해보니 업무적으로 만나던 사람들과 SNS에서 친해지기 쉽지 않다. ‘친구 신청해도 되나? 나 혼자만 가깝게 느끼는 것 아닐까?’

술자리에서 기분 좋게 ‘형님, 동생!’ 했던 기억은 있지만, 막상 퇴직 후에 다가가기가 조심스럽다. 진작에 ‘친구’를 맺어놓으면 ‘좋아요’ 클릭 하나로 내 존재를 계속 기억시키며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알맞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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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되돌아오는 메일이나 문자메시지가 있다. 몇 단계 거쳐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겠지만, 아쉬운 소리 할 게 아니라면 요즘 시대에 그렇게 정성스레 찾아줄 사람이 있을까? [출처 박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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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개인 메일 계정이다. 요즘 집 주소 챙기는 사람이 있을까? 이메일이 주소다. 그런데 퇴직과 동시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 도대체 연락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다. 평생 개인 이메일 하나 없이 회사 이메일로만 지내다가(믿기 힘들지만 실제로 꽤 있다) 퇴직하면서 회사 핸드폰마저 반납하고는 ‘아, 퇴직하니 찾아주는 사람이 없네’하고 있으니 답답할 일이다. 뒤늦게 계정을 만들어봐야 주변에 알릴 방법이 없다.

셋째, 회사 다닐 때부터 개인 명함을 만들어서 사적인 만남에서 사용해보자. 주변 누군가는 오직 내 소속과 직책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퇴사 후에도 계속 교류하게 될지 어떨지 조심스럽게 감이 온다. 회사명이 빠진 명함, 내 이름 석 자 가지고 어떻게 나를 각인시키고 상대를 설득할까. 더 중요한 것은 퇴직 후다. 비록 이름과 전화번호뿐인 명함이지만 생활에 절도가 생기고 나 스스로 나의 존재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회사와 동료에 대한 좋은 추억도 챙겨야 한다. 은퇴를 앞둔 마음이 가벼울 리 없고, 사람에 따라 회사와 동료를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은퇴 후 ‘내 편’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일단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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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나의 행장이 된 배낭. 노트북과 독서대가 들어가고 돋보기, 손 선풍기, 생수통, 세면도구, 휴지, 우산 정도 있으면 어디든 내 사무실이다. [사진 박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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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퇴사 후에 가급적 빨리 마련해야 할 것들이다. 첫째, 노트북이다. 나의 머리를 녹슬지 않게 하고 사회생활과 연결해줄 최소한의 도구다. 이것만 있으면 어디든 사무실이 되고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경력의 연속 선상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트를 만들 수 있다. 그게 뜻하지 않게 나의 생명줄이 될지도 모른다.

가끔 보면 직장생활에서 얻는 지식과 기술은 먹고 살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쌓인 대수롭지 않은 경력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관리직일수록 심하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그저 자신 없이 비실대는 모습이며 사회적인 낭비다. 요즘은 젊은 부모들이 육아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저자 소개에 ‘육아 전문가’라고 쓴다. 틀린 말인가? 어떤 일에 몇 년 이상 집중하면 전문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문지식이 술자리에서나 반복되다가 소멸하는 것은 너무 아깝다.

노트북에 틈틈이 정리하면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그랬다. 아이에게 대학입학 선물로 노트북을 사주면서 내 것도 40만 원대의 구형으로 하나 마련했다. 배낭 속에 넣고 다니며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꺼내놓고 뭔가 뚝딱거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작가가 되었다. 적지만 원고료와 강연료가 생긴다.

둘째, 나만의 공간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집 바깥에서 뭔가 도모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지인의 사무실 한구석 자리가 가장 좋겠지만 쉽지도 않고 편치도 않을 것이다. 하여튼 어디든 내가 늘어지지 않을만한 곳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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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은 나 혼자 무인도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런데 가끔 스스로 원치 않는 무인도행(行)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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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임대료 저렴한 사무실이 없나 살펴봤다. 그러다 고정수입도 없는데 따로 돈 쓰기 부담스럽고 어차피 책과 복사기가 필요할 것 같아 도서관에 둥지를 틀었다. 처음에는 전화 통화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불편했는데 요즘은 그래서 정말 편하다. ‘그 사람은 어디에 가면 항상 있다’와 ‘집에 있다’는 큰 차이가 있다. 집에 박혀있는 사람에게는 만나자고 연락하는 것부터가 불편하니 기회가 생기는 정도가 다르다.

현역은 이런 제안이 피부에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퇴직자는 공감할 것 같다. 퇴직은 무인도에 가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걱정만 가득한 채 스스로 무인도행(行)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또 퇴직준비를 은퇴자금 준비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돈에 여유 있는 사람도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세상과의 단절 때문이다.

은퇴 후 가야 할 길은 참 멀다. 준비할 것은 많겠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갈 수는 없다.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하고,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 퇴근길, 가방에 무엇을 챙겨 나갈 건가요?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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