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대표 시선집. 보르헤스는 단편소설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설가였고, 생전 주제와 형식을 가리지 않고 수천 쪽에 달하는 에세이를 남긴 산문 작가이자 평론가였으나, 무엇보다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를 첫 책으로 내며 문학 여정을 시작한 시인이기도 했다. 이 시집에서는 보르헤스 시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별도의 여섯 편을 함께 엮었다. 보르헤스의 시 세계는 그의 나이 30세였던 1929년과 50대 중반이었던 1955년 이후, 즉 청년기와 만년기로 나뉜다. 이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은 시력 상실이다. 특히 ‘창조자’는 보르헤스가 눈먼 후 공동 저작 외에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으로, 갑자기 암흑세계에 빠진 심경을 최초로 드러낸 것이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눈먼 도서관의 주인 보르헤스를 오마주하기도 하였다. 보르헤스 역시 자신의 내면 세계가 가장 진하게 녹아 있는 작품으로 주저 없이 ‘창조자’를 꼽았다. 단편소설의 플롯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작가의 자기 고백적 목소리는 보르헤스 문학의 미로를 푸는 열쇠가 바로 시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우석균 옮김/민음사)
◆사과 얼마예요=삶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담은 감각적인 시편들을 선보여 온 조정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진솔해진 삶의 언어와 더욱 깊어진 성찰적 언어로, 삶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섭리의 기미를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사과 얼마예요’는 수많은 층위의 비극을 인지하는 기민한 촉수를 품고 있다. 생 전체에 팽배한 비극의 원인과 존재의 이유를 가만히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 읽으며 독자도 이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미지의 슬픔으로 한발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조정인 지음/민음사)
◆울컥=삶의 희로애락과 평화와 상생을 노래하는 서정시 50편을 사진과 함께 엮었다. 시인은 분명하고 맑지 않은 세상에 대해 격렬히 토로하기보다는 말을 아끼고 묵묵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윤슬이 흐르는 저녁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며, 깊고 아득한 울림으로 반짝이는 물결의 노래를 듣는 시인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게 된다. 시와 사진이 함께 실렸다. 사진은 박종준 작가가 맡았다. 박 작가는 “사진은 카메라가 아니라, 사람이 담는 것”이라며 “사람과 사물, 그 곁에 긴 여백과 여운의 울림까지 담으려 했다”고 했다. (함순례 지음/도서출판 역락)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