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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담배, 진보적 시각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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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람들은 니코틴 때문에 흡연하는 것이지 타르로 인해 죽고 싶어 흡연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담배를 통한 위해경감(harm reduction) 이론을 주장하는 마이클 러셀의 말이다. 들어가긴 쉽지만 좀처럼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 흡연의 세계다. 니코틴의 중독성은 개인차가 심해 쉽게 끊는 분이 드물게 있지만, 암수술·심장마비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도 원점회귀를 반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니코틴은 중독성은 높지만 발암물질이 아니며, 반감기가 짧아 체내에 축적되지도 않는다. 이전에는 니코틴을 얻기 위해 불필요한 연기(타르)를 마셔야 했다면, 전자담배의 등장으로 거의 순수한 니코틴만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초에서 액상형 전자담배로 갈아탈 경우 독성물질 노출이 10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팩트다.

이 조심스러운 신제품에 대한 세 나라의 관점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가장 우호적인 나라는 영국이다. 지난해 8월 발표된 영국하원의 과학기술위원회 보고서는 전자담배 액상의 니코틴 함량이나 용량에 대한 규제가 연초에서 전자담배로 갈아타려는 흡연자의 만족도를 저하시키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하였다. 보고서는 연초담배용 경고문구를 전자담배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재검토가 필요하며, 독성이 낮은 만큼 세금도 낮출 것과 정신병동에서의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담고 있다. 미국은 어떨까?

지난해 미국의 과학, 기술, 의학아카데미가 발간한 680쪽 분량의 방대한 보고서인 ‘전자담배의 공공 보건 영향’은 “전자담배 증기는 연초에 비해 종류와 양 모두에서 적은 독성물질을 포함하고 있음. 인체에 대한 단기실험에서 훨씬 덜 해로운 것으로 보임. 그러나 장기적 건강효과와 전자담배 자체의 내재된 독성, 젊은이들의 중독성으로 인한 사회 전체 편익은 아직 잘 모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마디로 덜 해로울 가능성은 인정하되 좀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한국은 도입 초기부터 초지일관 ‘전자담배에도 인체에 해로운 성분들이 검출되니 또 다른 마약일 뿐’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뿐이다. 영국이 진보, 미국이 중도라면 우리는 극보수인 셈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근거와 사실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보다는 선악을 가르는 이분법식 이데올로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러한 차이는 ‘비교대상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국내 언론과 학계가 만들어내는 전자담배 유해론은 비교대상이 ‘비흡연’이다. 반면 전자담배가 유익하다는 입장은 비교대상이 ‘연초담배’이다. 전자담배에서 인체에 해로운 화학물질이나 중금속이 발견되면, 한쪽은 비흡연보다 ‘해롭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연초담배보다 ‘덜 해롭다’고 한다.

필자의 우려는 우리 사회의 경직성이 곧바로 한국 흡연자의 피해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독자들의 가족이나 친지 중 흡연자 한 명쯤은 있다는 현실을 떠올린다면, 지금과 같은 정보 편향은 참으로 중대한 사태이다. 스웨덴의 경우 1970년대 초 니코틴이 주성분인 스누스(Snus)라는 입담배가 출시되어 인기를 끌면서 연초 흡연율이 급감하였다. 이후 장기적 역학연구에서 스웨덴의 암 발생률은 유럽연합국 중 최하위로 떨어졌다. 필자는 전자담배도 스누스와 비슷한 결과를 보일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만일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지금 이 시대에 바른 정보와 선택권을 박탈당한 한국 흡연자들의 건강위해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전자담배의 아이폰’이라며 등장한 쥴(Juul)이 한국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 이유는 니코틴 함량 3%, 5%짜리가 대세인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1% 미만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흡연자 본인은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피해가 덜한 전자담배로 바꾸려면 추가로 값비싼 기기비용과 충전 등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겨우 바꾸었더니 연초가 주는 소위 ‘타격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도로 연초를 피울 수밖에.

인터넷상에는 쥴의 빈 액상 카트리지(Pod)에 고농도 니코틴을 주입하는 방법이 우후죽순처럼 퍼지고 있어서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행복지수 1위 ‘은둔의 나라’ 부탄처럼 흡연을 아예 불법으로 한다면 모를까, 어차피 니코틴 중독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사회라면 좀 더 진보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정유석 | 단국대병원 금연클리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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