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지음 | 선우미디어 | 1만5000원
# 마땅히 즐길거리가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 KBS라디오의‘스무고개’는 엄청난 인기였다. 특히 한국남, 양주동 박사 등의 입담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낭랑한 목소리의 여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대학 2학년 때부터 방송 패널로 활동했다니 가히 그 시대를 풍미한 방송인이자 ‘원조 아이돌’이 아닌가 싶다.
# 지금도 대학로에는 60년이 넘은 레트로 감성의‘학림다방’이 있다. 옛 서울대생들의 제25강의실이자 젊은이들의 순례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국 현대사를 품은 그 오래된 공간의 한때 주인이었다. 물론 본인은 그곳 1층에 마리오네트(인형)극장을 세울 욕심에 인수해서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날까지 다방의 명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에 흐뭇해한다. 특히 건물을 증축해 그곳에서 서울국제마리오네트축제를 두 번씩이나 개최한 것은 본인의 긍지이자 큰 추억이라고.
#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35년 만에 찾은 고국의 공항에서 “나의 유치원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이름을 부른 주인공. 백남준이 “C’est la vie!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라고 말한, 견우와 직녀처럼 사랑이 비켜간 여자. 또 백남준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인 1968년 ‘공간’이란 잡지에 ‘뉴욕 斷想’이라는 난해한 시로 그녀와의 어린 시절 기억을 담기도 했다.
이런 장면들로만 얼핏 보면 정체성이 모호한 듯 하지만 문화계의 마당발인 이경희 원로작가의 이야기다.
이경희 작가가 이번에 미수를 맞이하여 그 88년의 삶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서 ‘李京姬 창신동에서 지금 여기’를 출간했다. 저자는 책에서 백남준과의 추억이 어린 창신동의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학창시절, 결혼, 육아, 세계 여행 등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써 내려갔다. 처음에는 자서전을 쓸 생각도 했지만 그동안 썼던 에세이 속에 그의 삶의 흔적들이 모두 들어있기에 그 글 중에 추렸다고 한다.
저자의 글은 한결같이 어렵지않다. 쉽게 읽힐 수 있는 글로 저자와 저자의 주변을 아름답게 보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오래된 추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88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공도 깊다. 모나지 않은 둥그런 글로 지금 여기 막막한 세상을 살며 가슴을 앓는 사람들에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녀의 글에는 한국여성 특유의 넋두리도 없고, 고요한 별빛을 바라보니 가슴이 울렁거린다 라는 따위의 사춘기적 몸부림도 없다. 그저 주부의 애정 어린 입김이 그녀가 묘사하고 있는 모든 대상들과 인물들을 감싸고 있다”고 평했다.
이경희 작가는 1970년 첫 수필집 ‘산귀래’로 문단활동을 시작한 이후‘뜰이 보이는 창’, ‘백남준 이야기’, ‘외로울 땐 편지를’ 등 많은 책을 펴냈으며 영문 수필집 ‘Back Alleys in Seoul’을 출간하기도 했다.
또한 UN이 주최하는 국제여성회의에 참가하는 등 많은 국제 활동과 해외여행의 경험들을 저자 특유의 감성으로 녹인 기행문학 장르를 구축, ‘이경희의 기행수필’을 발간하기도 했다.
책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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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뒤셀도르프의 <백남준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쿤스트파리스트미술관 앞에서.(2010.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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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영 기자 iimi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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