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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6·25전쟁 69년…되돌아본 '괴산군 향토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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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청년방위대로 출발…북 패잔병과 22개월 전투

300여명 초개와 같이 목숨 던져 가족·이웃 생명 지켜

뉴스1

괴산군 칠성면 사평리에 건립된 향토방위용사 전적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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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뉴스1) 김정수 기자 = 호국 보훈의 달인 6월. 6·25전쟁 전후로 고향을 지키기 위해 조직돼 활약한 충북 괴산군 향토방위군 활동이 빛을 보고 있다.

괴산군 향토방위군은 1949년 12월 당시 괴산군의 남부 4개 면(증평·도안·사리·청안)의 청년방위대가 만들어지면서 출발했다.

당시 청년방위대는 초대 대대장에 홍익현씨와 배속장교로 유증규(괴산)·조시행(불정)·이광우(증평)씨가 부임하면서 조직됐다.

청년방위대는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6개월 후인 12월 국민방위군으로 명칭이 바뀐다.

1951년 5월 다시 향토방위군으로 이름을 바꿔 대대본부, 연풍중대, 청천중대를 조직해 전투중대로 개편 후 육군 5군단에 배속됐다.

이후 향토방위군은 6·25전쟁에서 전공을 세운다. 북한 정예부대 10사단과 남부군 등은 낙동강 전투에서 타격을 입고 괴산 낙영산·도명산·가령산과 쌍곡·군자산·칠보산·보배산을 거쳐 북으로 퇴각했다.

경북 문경에서 침입한 적 패잔병도 장연과 연풍을 거쳐 북상을 하던 중이었다.

이때 향토방위군은 이들의 북상 퇴로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기간이 무려 22개월간 이어졌다.

무장공비와 북한군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며 전공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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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칠성면 사평리에 건립된 괴산군 향토방위용사 비문.©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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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일은 괴산향토사연구회가 2007년 펴낸 ‘향토방위군 발자취’ 책자에 담겨져 있다.

이 책에서 홍익현(2013년 작고) 대대장은 “향토방위군이 청천·칠성·연풍에서 패잔병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청천으로 들어와 괴산·칠성 등으로 북상해 보급기지를 확보했다면 괴산은 재앙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괴산향토방위용사 전적비 보존회는 지난 5일 칠성면 사평리 괴산군향토방위용사 전적비에서 추념제를 지내며 이들의 호국정신을 기렸다. 올해로 14번째 행사였다.

2007년 6월 건립한 비(碑)는 2개가 있다.

하나의 앞면은 ‘향토방위용사 전적비’와 뒷면에는 향토방위군 유공자 220명, 전몰용사 68명 등 288명의 명단이 있다.

또 다른 비 앞면은 “향토방위를 위해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참전 유공자들의 정신을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계승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정성모아 새겨진 돌비보다 더 높은 넋이여 이 나라 이 강토의 수호신이 돼 천세 만세토록 영원하리라”라는 홍익현 대대장의 비문이 기록돼 있다.

괴산군에서는 6·25전쟁 전후로 고향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용사는 288명 이외에도 청천면 선평리 향토방위전몰용사 32명을 포함해 3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청천면에도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5229@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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