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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취재일기] 한전이 오죽하면 반기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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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정부보다 시장과 법원이 더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참다 참다 정부의 선심성 대책에 날린 ‘경고장’일까. 한국전력 이사회가 지난 21일 정부의 여름철 전기요금 인하안에 ‘반기’를 들었다. 한전은 정부 지분이 51%가 넘는 전력 공기업이다. 이사회가 거수기 노릇을 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만큼은 달랐다.

전기료 인하안의 골자는 전력 사용량이 많은 7~8월에 한시적으로 누진제를 완화해 전기료 부담을 줄여주는 내용이다. 이렇게 하면 한전은 지난해 기준 2874억원의 손실을 떠안는다. 생색은 정부가 내고 부담은 한전이 지는 꼴이다.

안 그래도 정부 ‘탈원전’ 정책 때문에 6년 만에 적자로 돌아선 한전이다. 2년 전만 해도 7조1483억원의 흑자를 거둔 한전은 지난해 1조1745억원의 적자를 냈다. 올 1분기에도 6299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적자가 뻔한 상황에서 정부 방침에 따라 추가 손실을 수용하는 건 누가 봐도 회사를 해치는 결정이다. 한전 소액주주들은 “정부 개편안을 의결하면 이사진을 배임죄로 고발하겠다”고 공언했다. 한전 이사회는 로펌에 법률 해석을 의뢰했다.

전기료를 내리겠다는데 여론이 뜨뜻미지근한 건 이번 대책이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이라서다. 정부 대책대로라면 지난해 기준 1629만 가구가 월평균 전기료 1만142원을 아낄 수 있다. 전기료 내기 버거워 폭염에 냉방기기도 마음껏 못 트는 저소득층에게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줄어든 부담은 결국 누군가 떠안아야 할 짐이다. 공기업인 한전의 적자는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정부가 재정으로 보전해주겠다고 한 700억원도 세금이긴 마찬가지다.

정부의 중장기 에너지 대책과도 엇박자다. 전기료 인하는 에너지 소비를 줄여 탈원전과 보폭을 맞추겠다는 정부 에너지 정책과 상충한다. 온기운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는 이달 초 발표한 ‘3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2040년까지 에너지 수요를 18.6% 줄이겠다고 밝혔다”며 “누진제 완화는 전력 과소비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아 에너지기본계획에 ‘역주행’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값싼 전기로 난방하는 바나나 농장’이 정상은 아니다. 역대 정부에서 전기료 인상은 언제나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격이었다. 그런데 탈원전 정책에 따라 이번 정부에선 ‘방울’이 더 무거워졌다. 소비자 부담 원칙에 따라 선진국보다 상대적으로 값싼 전기료를 현실화하는 게 정공법이다. 과한 혜택을 받는 산업용 전기료 체계도 뜯어고쳐야 한다. 저소득층은 별도 복지 정책을 통해 도우면 된다. 그런데 정부는 “여름철 전기료 인하를 차질없이 진행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올해 여름도 이래저래 뜨거울 것 같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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