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조성부지에서 확인된 다양햔 형태의 지석묘(고인돌). 신분의 상중하를 알 수 있는 지석묘들이다. |
서울 석촌동과 풍납동 일대는 백제 왕릉급 고분(석촌동)과 도성(하남위례성·풍납토성)이 확인된,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500년 역사를 오롯이 증거하는 핵심유산이다. 하지만 개발의 광풍에서 사라질 뻔 한 유적을 온몸을 던져 막아낸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75·선문대 석좌교수)였다.
이교수는 1983년 백제 적석총인 석촌동 3호분과 4호분 사이에 도로 관통 공사를 강행하고, 마구 파헤친 고분에서 백제 인골이 포클레인 삽날에 찍혀나가는 참상을 확인했다. 이교수는 한편으로는 공사 차량을 몸으로 막아서고 한편으로는 관계요로를 통해 적극적인 유적 보존 운동을 벌였다. 결국 2년여의 싸움 끝에 석촌동 고분군 일대가 백제유적보존지구로 지정됐다. 3·4호분 사이를 관통하려던 도로계획은 지하차도(백제고분로)로 변경됐다.
춘천 레고랜드 테마파크 조성부지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유적. 총 3300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이형구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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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후 이형구 교수는 1996년 말 아파트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던 풍납토성 내 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했다. 이교수는 현장 지하벽면에서 백제토기편이 무수히 박혀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언론에 공개했다. 이후 대대적인 발굴 끝에 풍납토성이 백제시대 연인원 450만명이 총동원된 엄청난 규모의 도성이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풍납토성은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후손들에게 후회없도록 처리하라”고 당부함으로써 극적으로 보존됐다.
확인된 고인돌 170기는 지금 흙으로 덮었거나 철거됐다. 170기 중 30기만 유적공원에 이전복원할 예정이다.|이형구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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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고학자의 힘겨운 싸움
그로부터 20여 년 후 이형구 교수는 또 한 번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강원도 춘천 중도에서 발견된 이른바 ‘중도 유적’의 보존을 둘러싼 힘겨운 싸움이다. 지난 2011년 중도에 블록장난감(레고)를 테마로 한 이른바 레고랜드 테마파크를 조성한다는 계획이 수립되면서 중도유적은 개발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기의 고인돌이 확인된 곳이 철거된 C2지역. 고인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이형구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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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추진을 위해 시행된 2013년 1단계 발굴조사에서 무려 1400여기의 청동기 유구가 쏟아져 나왔다. 고인돌 101기. 집터 917기, 구덩이 355기, 바닥 높은 집터 9기와, 마을을 지키는 긴 도랑 등…. 고고학적인 의미는 대단했다. 우선 강원도 지역에서 고인돌이 이처럼 무더기로 발굴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집자리에서 ‘둥근 바닥 바리 모양토기’(원저심발형토기)와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가 확인됐다. 유적의 최고(最古) 연대가 조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4~12세기)임을 알려주는 지표유물들이다. 고조선 시대의 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도 출토됐다. 남한지역 집터에서 처음 확인되는 유물들이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둘레 404m의 도랑(환호·環濠)과 농사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경작 유구까지 확인됐다. 2015년 2단계 조사에서도 650여기, 이후 마지막 단계 조사에서 1243기가 차례로 조사되는 등 총 3300여기의 유구가 나왔다.
현장에서 철거된 고인돌의 돌들은 ‘잡석’이라는 이름이 붙어 야적되었다. 170기중 55기가 철거되어 ‘잡석’처리되어 보관중이다. 이중 30기 정도만 이전복원될 예정이라 한다.|이형구 교수 제공 |
특히 주목되는 유구는 다양한 형태로 열지어있는 고인돌이었다. 중도의 고인돌은 교과서에서 배운 엄청난 규모의 탁자식(북방식) 혹은 바둑판식(남방식)은 아니었다. 많은 돌을 이용해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는 그 중심에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하고 그 위에 상석을 올린, ‘소박한’ 형태의 고인돌이었다. 지하의 무덤방 위를 바로 뚜껑으로 덮는다 해서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라 한다.
레고랜드 부지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지석묘. 이렇듯 다양한 고인돌이 운집해있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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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고인돌의 배열이 3열로 40여 기가 길게 조성돼있고, 마을 공간 안에도 다수 분포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 가운데는 5~6세의 어린아이가 구부린 자세로 석관에 묻힌 아주 작은 고인돌도 보였다. 청동기 마을의 공동묘지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골 마을의 제사와 회의를 주관하는 마을 어른의 선산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마을 이장 정도 되는 가문의 선산(先山) 같은 개념일 수도 있다.
발굴된 집자리도 흥미로웠다. 그 중 조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4~12세기)의 집자리는 요즘 아파트의 평수와도 뒤질게 없는 26평(86.5㎡)에 달했다. 이 집의 한가운데에는 집안을 따뜻하게 해줬을 화덕자리가 조성돼 있었다. 그런데 4줄로 연결된 통나무가 불에 탄 그 형태 그대로 무너져 있었다. 이것은 벽체 혹은 천장이 불에 타면서 그대로 무너져 버린채 3400~3200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는 얘기다.
조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4~12세기)의 26평형 주택. 그런데 이 집은 어느날 갑자기 난 화재 때문에 폭삭 주저앉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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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탄 집자리 가운데는 집안에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유구들도 있었다. 무슨 일일까.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이삿짐을 다 옮긴 뒤 옛집을 불에 태우는 이벤트를 벌인 것은 아닐까.
따지고보면 25~26평(86㎡)와, 47~48평형과 38평형은 요즘 주택시장에서도 기준으로 삼는 아파트의 평형이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집의 기준은 변함이 없는 것인가.
중도 청동기 마을의 중심연대는 청동기 중기(기원전 9~6세기)로 편년된다. 조기 청동기 유구도 있지만 기원전 9~6세기 집터가 다수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형구 교수는 “조사된 유구 중 3분의 2정도가 청동기 중후기의 주거지로 분류된다”면서 “이 무렵 1가구당 5~6명 살았다고 치면 4000~5000명의 주민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았다. 이교수는 “삼한시대 인구는 2500~35000명 정도면 한 나라의 구성원과 같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면서 “중도는 마치 역사 시대의 궁성 같은 세계적인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구획을 나눠 중도유적을 발굴조사한 7개 문화재조사기관은 2017년에 펴낸 약식조사보고서에서 ‘중도유적인 한국고고학 역사상 청동기 시대 최대의 마을유적’이라 규정했다.
청동기 마을의 지도급 인사가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집자리(주거지)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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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는 개발과 보존의 ‘윈윈’ 사업인가
이쯤되면 서양의 플라스틱 놀이기구 공원(레고랜드)을 세운다는 계획을 접고 청동기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유적공원으로 용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개발계획은 강행됐다. 이미 2013년 7월 중도를 방문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레고랜드 사업을 ‘5대 현장대기 프로젝트 지원사업’으로 독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재청과 강원도는 중도(127만㎡) 안에서 발굴조사된 유구 중 청동기 시대 환호(도랑) 지역 6만1500㎡와 철기~삼국시대 유적 3만2000㎡만 보존키로 했다. 사업을 담당한 강원 중도 개발공사는 이 두 곳에 청동기 및 원삼국 유적공원을 조성, 조사된 유구들을 옮겨 보존·전시하고, 별도의 전시관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윈윈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무작정 보존만 외칠 게 아니라 활용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그럴듯 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이런 계획은 겉만 번드르르했지 문화유산을 파괴한, 아니 우리 역사의 대참사로 기록될 것”이라 여겼다.
중도에서 출토된 유물들. |이형구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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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복원되는 것은 3300기 중 지석묘 30기
이형구 교수는 “결국 확인된 3300여기의 유구 가운데 유적공원에 이전 복원되는 것은 100분의 1도 안되는 지석묘 30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라면서 “발굴 당시의 사진과 훼손·복토·매립 후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중도에서는 고조선 시대의 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도 확인됐다.|이형구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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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의 원죄
기자가 레고랜드 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과 통화하면서 “문화재가 쏟아진 사업초기에 전면보존결정을 내렸다면 어땠겠냐”고 묻자 이 공무원은 “그랬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라 답했다. 초기라면 몰라도 지금까지 총 3000억원 가량의 사업비가 투입된 지금에 와서 되돌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홍진 강원도 글로벌투자 통상국장은 “모든 사업 과정은 일일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진행된다”고 강조했다.
레고랜드 테마파트 조성계획에 따르면 극히 일부의 면적에, 극히 일부의 유구만 이전 전시될 계획이다. 나머지 유구는 복토되거나 철거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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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 아니라 이형구 교수는 “레고랜드 사업의 강행에 고고학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비판했다.
중도 유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40여 년 전인 1977년 무렵이었다. 국립박물관 조사단이 중도에서 무수히 박혀있는 경질의 무문토기편을 발견한 것이다. 이 경질무문토기에 ‘중도식 토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도에서 ‘안정적으로’ 확인된 원삼국시대(기원전후~3세기 사이의 고고학 시대구분)의 표지유물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후 1980년대에 5차례에 걸쳐 국립박물관의 발굴조사가 이어져 270여기의 유구를 확인했고, 5권의 보고서가 나왔다. 2010년에는 이른바 4대강 사업에 따른 발굴조사에서 200여기의 유구가 추가로 조사되기도 했다. 만약 그 사이 어떤 전문가, 어떤 기관이 나서 중도를 사적으로 지정했다면 ‘레고랜드 테마공원’ 같은 개발사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레고랜드 사업의 자문을 맡은 어느 학자는 “홍수가 나면 물이 차는 중도를 사적으로 지정하기란 무리였을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이형구 교수는 “중도(72~73m)의 만수위는 71.5m이기 때문에 아무리 물이 차도 50㎝의 여유는 있으니 물에 잠길 염려는 없다”고 반박한다.
레고랜드 부지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고인돌, 실제로 시신을 묻은 전형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이것이 훗날 적석총으로 발전했다.|경향신문 자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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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미 상당한 액수의 예산이 투입된 사업이어서 문화재가 나왔다고 전면 보존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중도 유적과 같은 청동기 유적은 춘천 인근에 많다”면서 “기왕에 진행된 사업을 포기할만큼 중도 유적은 매우 특별하지는 않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밖에 “발굴 자체가 고고학적인 의미에서는 파괴행위가 아니냐”면서 “중도의 경우 이미 개발을 위해 구제발굴을 끝낸 상황이니 무조건 보존을 외치기도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그 어떤 경우든 이렇게 3300여기의 유구가 쏟아진 유적을 개발하도록 한다는 것은 고고학과 고고학자의 수치”라고 비판했다.
2013년 7월24일 춘천 중도 레고랜드 테마파크 예정지를 방문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왼쪽)과 1992년 5월 극적으로 보존된 일본 규슈 요시노가리 유적을 격려차 방문한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 |이형구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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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요시노가리 유적
이 교수는 이와관련,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마침 이 교수 주도로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춘천 중도 유적의 학술적 가치와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대회’에서 개발사업 도중 쏟아진 유구 때문에 유적의 전면 보존을 결정한 요시노가리의 사례가 발표됐다. 발표자는 히로세 유이치(廣懶雄一) 전 일본 사가현(佐賀縣) 요시노가리 유적 조사담당계장 등이었다.
이에 따르면 1981년 일본 규슈(九州) 북부지역인 사가현 간사키(神岐)에서 공업 단지 조성 공사가 계획됐다. 사가현은 농업 외에는 주요 산업이 없는 낙후지역이어서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고 고용을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사가현은 문화재 지역 일부(6헥타르)는 보존하고 나머지 67.7헥타르는 개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발굴결과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엄청난 유구와 유물이 쏟아졌다. 3000여기에 이르는 독무덤과 머리없는 인골, 제사토기, 조개팔찌, 머리카락 등 고대국가 발전과정을 볼 수 있는 중요 유적이 확인된 것이다. 발굴단은 일본의 대표하는 야요이 시대의 최대규모 이중환호와 취락이 완전한 형태로 남았고, 한반도계 석기와 무문토기, 송국리형 주거지, 세형동검 등이 출토됨으로써 한반도와의 문화 교류 양상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 관계자들은 “특별한 유적이지만 개발을 멈출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공사를 강행하려 했다.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발굴된 한반도 송국리형 주거지. 한반도와의 문화교류를 증거하는 유구로 각광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일본 속의 고대 한국> 특별전 도록, 2007년’에서 |
요시노가리 유적의 남내곽 구역. 환호에 둘러싸인 특수구역이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주거공간으로 보인다. 발굴 때의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의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 > 특별전 도록, 2007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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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9년 학계와 언론에서 “한 여인을 왕으로 세우고, 궁실에 살고 성책이 엄격하며 망루가 있어 언제나 병사가 지키고 있다(乃共立一女子爲王 居處宮室 樓觀 城柵嚴設 常人有持兵守衛)”는 <삼국지> ‘위지·왜인전’에 등장하는 전설의 여왕국(야마타이국·邪馬台國)과 유사한 유적이라 ‘스토리텔링’ 했다. 망루 유구의 발견이 결정적이었다. 마침내 시민차원의 유적보존운동이 벌어졌고, 일본 문화청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려면 조사구역을 넓히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가현에서는 “문화청이 개발을 허용했고, 주민들도 공단 고용을 기대해서 땅을 팔았고 이미 막대한 예산까지 투입되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 유구 유물이 계속 쏟아지자 사가현은 마침내 공단조성을 포기하고 유적의 전면 보존 및 복원을 결정했다. 발표자인 히로세 유이치는 “현재 요시노가리 유적은 국영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올해 관람객이 70만명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발표자인 히로세는 “불과 몇일 뒤면 요시노가리 유적은 불도저로 파괴될 운명이었다”면서 “그런만큼 요시노가리 유적의 보전은 야구로 치면 ‘9회말 투아웃의 역전 홈런’로 알려져 있을만큼 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요시노가리의 남내곽 특수구역의 복원 모습이다. 망루와 추도형 주거지 등을 완전 복원했다. 원래 공단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요시노가리는 그 계획이 전면 취소되고 유적공원으로 변경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 > 특별전 도록, 2007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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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형구 교수는 2015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비로 펴낸 <박근혜 대통령께 드리는 춘천 중도유적 보존을 위한 백서>를 발간해서 제출한 이후에도 유적보존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최근에는 밤을 세워가며 편찬한 <중도문화-춘천 중도유적>(새녘·2019)을 펴내 관계요로에 보냈고,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청원서를 제출했다. 중도유적 보존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도 이교수의 발품 때문이었다.
레고랜드 테마파크 사업은 영국 멀린사가 2021년 완공·개장을 목표로 진행중이며, 이번 달까지 기초공사와 설계변경, 디자인 작업을 완료한다는 목표아래 6월중으로 시공사를 선정할 계획이다. 중도 유적의 완전 보존은 물건너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요시노가리 유적의 보존을 ‘9회말 투아웃 후의 역전홈런’이라고 하지 않느냐”면서 “중도유적의 보존이 다들 늦었다고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 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9회말 투아웃 후의 역전홈런이 아니겠느냐”고 기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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