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자 윤중천씨 등에게서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를 받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5월 1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는 차량에 탑승해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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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기자를 하며 확신에 가깝게 느낀 깨달음이 하나 있다. 검찰의 진짜 힘은 기소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기소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는 것. 공소권을 독점한 것도 강력하지만, 자기 판단에 따라 기소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 때문에 검찰은 더 막강한 조직이 된다.
만일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무리하게 기소하더라도, 법원만 중심을 잘 잡으면 피해나 명예가 뒤늦게라도 회복 가능하다. 기소를 하면 재판에서 수사과정이 일부나마 공개된다. 그러나 검사의 고의적 은폐나 자발적 외면 또는 비자발적 태업 탓에, 재판에 넘어갔어야 할 사건이 기소되지 않는 일은 포착하기도 만회하기도 매우 어렵다. 검찰은 작년 처음 감사원 기관운영감사(기소ㆍ공소유지는 제외)를 받았을 정도로 견제에서 벗어나 있다. 사회 전체가 받는 폐해로 보면 무리한 기소보다 부적절한 불기소의 해악이 크다.
재기수사나 재정신청, 또는 특별검사라는 보완장치는 있다. 그러나 재기수사나 재정신청을 통해 권력형 비리나 검사 관련 사건이 기소되는 일은 거의 보지 못했고, 특검은 정치 상황에 좌우되는 면이 크다. 내부고발이 드물게 나오긴 하나, 조직의 고발자 대접을 보면 내부고발 활성화를 기대하긴 어렵다(일부 검사들은 고발자를 비난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다수 검사들이 아닌 극소수 내부 고발자에게서 검찰의 건강한 미래를 찾는다).
물론 일반사건에서 일부러 진실을 덮거나 사법처리를 게을리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에 치명적이거나 고위 검사가 관련된 건에서, 우리는 유독 뒷맛이 개운치 않은 불기소를 많이 봤다. ‘검찰이 덮으면 누구도 모른다’는 의심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건 그래서다.
이 의심이 합리적일 것이란 점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김학의 스캔들이다. 등장인물 신원이 분명한 동영상이 드러났음에도 세 번이나 수사를 해서야 그를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정의가 바로 섰다고 보는 이는 별로 없다. 그새 공소시효는 지났고, 진술이 번복되거나 증거가 옅어지면서, 결국 일부 뇌물 혐의에서만 제한적 기소가 이뤄졌을 뿐이다.
사건이 덮인 것은 객관적 사실에 가까운데, 누가 왜 덮었는지 어떤 비호가 있었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국민들은 김학의 개인에 대한 단죄만큼 그를 감쌌던 보이지 않는 손이 드러나길 바랐지만, 기대는 채워지지 못했다.
이번 수사단이 진실을 덮거나 외면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수사단은 별건수사 지적까지 받아가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후 노력만으론 6년이라는 기간 동안 땅속에 묻혀 조각나고 퇴색한 진실을 복원할 수 없다. 아무리 잘 된 재수사라도 첫 수사가 거둘 수 있던 성과를 넘기는 어렵다. 기소해야 했을 시점에 기소하지 않았던 부작위의 여파는 이처럼 크다.
스스로 자기 식구를 수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납득시키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검찰로서도 비극이다. 이게 반복되면 아무리 열심히 수사해 내린 결론도 “봐줬겠지”하는 선입견을 피하기 어렵다. 검찰 조직이나 개별 검사가 부끄러울 것 없다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국민 신뢰를 받지 못하는 나홀로 떳떳함은 그저 아집일 뿐이다. 불신이 누적되는 이유는 검찰이 특별히 나쁜 조직이어서가 아니고, 검사들이 남보다 악한 존재여서도 아니다. 자기 허물을 스스로 밝혀야 하는 그 ‘구조’의 문제다.
악순환을 탈출하려면 검찰이 스스로의 환부를 도려내던 무딘 메스를 반납하는 수밖에 없다. 그 메스는 공수처 같은 외부 조직이 다시 날카롭게 벼린 다음 제대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자기 식구 사법처리를 스스로 결정하는 그 권한을 버릴 때, 비로소 검찰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던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가장 놓기 어려웠던 권한을 포기한 검찰에 대한 신뢰도 싹틀 것이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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