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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특별한 형제’가 된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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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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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규범이나 제도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해체하여 그 허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에 상영 중인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는 후자의 경우다.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의 의미를 해체하여 재구성한다. 가족이라는 틀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대로 그것의 견고함은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 구성원 중 하나에게 심각한 장애가 있을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영화는 두 장애인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이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강제로 복지원에 맡겨진 세하, 그리고 어렸을 때 수영장에서 어머니한테 버림을 받은 동구.

세하는 목 아래로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지체장애인이고 동구는 대여섯 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지적장애인이다. 혈연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깊은 트라우마와 장애다. 그래서 세하는 동구의 머리가 되어주고 동구는 세하의 손발이 되어준다. 그런 지 20년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족보다 더 가족이 된다. 새로운 의미의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스토리의 말미에서 동구가 자기를 버렸던 어머니한테 돌아가 살다가 세하에게 돌아가는 것은 책임 때문이다. 세하는 자기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이요 가족이니까.

세하와 동구가 살았던 가톨릭계 복지원 이름은 ‘책임의 집’이다. 그런데 그러한 책임의 집은 가족과 사회의 무책임을 전제로 한다. 수많은 세하와 동구가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은 가족과 사회가 책임의 집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의 특별한 형제는 비난의 기색 없이 그 현실을 그저 조용히 비추며 그들의 상처를 다독인다. 영화는 사람들을 정상인과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분하면서 장애인을 스토리의 중심에 놓고 조용히, 정말이지 아주 조용히 우리의 성찰을 요구한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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