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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못찾겠다, 국산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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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SFC) 지하 2층에 있는 한 편의점은 지난달 초부터 아사히·칭타오·기네스 등 수입 맥주 4캔을 평일 퇴근 시간인 오후 5~7시에 한해 8800원에 팔고 있다. 매장 앞에는 '전국 최저가'라는 광고 문구가 붙었다. 점주가 본사와 협의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파격적인 가격에 수입 맥주를 내놓은 것이다. 세븐일레븐은 지난 3월부터 스페인 맥주 '버지미스터' 4캔을 6000원에 판매 중이다.

저렴한 수입 맥주의 상징이었던 '4캔=1만원'까지 깨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다 판매량 세계 1위인 중국의 '설화'가 내달 한국에 진출한다. 중국에서 설화 맥주 가격은 1L에 1000원 정도로 국산 병맥주(550㎖에 1100~1200원)의 절반 수준이라 '반값 맥주'라는 말까지 나온다.



낮은 가격을 앞세운 수입 맥주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다.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수입 맥주 종류는 10년 전엔 10여 종이었으나, 지금은 400종이 넘는다. 그 사이 국내 맥주업체들은 공장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국내 2, 3위인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는 맥주공장 가동률이 30%대까지 추락했다. 국내 1위 맥주인 '카스'의 매출은 지난해 뒷걸음쳤다. 1994년 출시 이후 'IMF 사태' 등 예외적인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 국내 맥주업체 관계자는 "수입 맥주뿐 아니라 최근 수제 맥주에도 치이면서 일반 국산 맥주는 벼랑 끝에 몰렸는데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 거세지는 수입 맥주 공세



조선비즈


값싼 수입 맥주들이 잇따라 들어오면서 국산 맥주의 경쟁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창고형 할인점 이마트 트레이더스는 벨기에 맥주 '필스너' 12캔(500㎖) 1박스를 1만1980원에 판매 중이다. 1개에 998원꼴로, 1000원이 안 된다. 대형마트에서 카스 500㎖ 캔은 낱개로 1940원에 팔린다.

국산 맥주는 수입 맥주와의 가격 경쟁에서 출발점부터 불리하다. 기본적으로 주세(酒稅) 때문이다. 현행 주세는 출고 가격에 세금을 매기는 종가세(從價稅) 방식이다. 국산 맥주는 원재료비에 마케팅비·이윤 등을 붙인 출고가에 72%의 주세가 붙는다.

수입 맥주는 수입 신고가에 관세와 주세가 붙는다. 관세를 물긴 하지만 수입 신고가가 낮으면 주세도 그만큼 낮아지기 때문에 값싼 수입 맥주는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주류업체 관계자는 "국내 맥주시장은 국산 맥주업체에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말했다.

경희대 정재석 교수(국제마케팅)는 "국산 맥주는 맛이 없다기보다는 계속 새로운 맥주를 찾는 소비자들의 기호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이런 시장의 변화를 수입 맥주업체들이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락하는 국산맥주… 손발 묶여 마케팅도 쩔쩔

국내 맥주시장은 회식이 줄어드는 등 음주 문화가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쪼그라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입 맥주 판매가 늘면서 국산 맥주 판매는 더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유통·소비 환경도 갈수록 국산 맥주에 불리하다. 대형마트와 편의점 등 유통업체들은 수시로 수입 맥주 할인 행사를 한다. 온라인 유통업체에 빼앗긴 고객을 되찾아 오기 위해 인터넷 판매가 금지된 주류를 마케팅 수단으로 앞세우는 것이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보통 집에서 마시기 위해 맥주를 찾는 사람들은 국산 대신 수입을 선택한다”며 “수입 맥주 4캔에 9000원 등의 행사를 수시로 한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도 국산 맥주엔 악재다. 국산 맥주는 가정용보다 음식점 등에 들어가는 ‘업소용’ 비중이 높다. 하지만 회식 자리가 줄면서 유흥업소에서 소비되는 국산 맥주가 줄어드는 것이다. 주류업체 관계자는 “판매가의 15% 이상 경품을 제공하는 것이 금지돼 있는 등 각종 규제로 마케팅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맥주 업체의 부활을 위해선 연구개발(R&D)과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문정훈 서울대 교수(농경제사회학부)는 “오비맥주를 소유하고 있는 AB 인베브 같은 글로벌 맥주 업체들은 지역의 특색 있는 맥주 업체를 인수·합병하면서 시장점유율을 유지한다”며 “국내 맥주업체들도 소규모 수제 맥주 회사 등을 적극 사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성훈 기자(inou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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