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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포항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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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기획, 포항의 3.1운동 2편

주동자들은 포항교회 성도와 부설 영흥학교 교사들

3월11일 포항장날이 거사일

밀정에 의해 사전에 발각됨

김선영 PD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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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포항CBS <유상원의 톡톡동해안> FM 91.5 (17:05~17:30)
■ 진행 : 유상원 아나운서
■ 제작 : 김선영 PD
■ 대담 : 이상준 향토사학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포항의 3.1운동사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만나보죠..
안녕하십니까?‘

◆ 이상준> 안녕하십니까?

◇ 유상원> 지난 시간에 3.1운동의 의미와 포항의 3.1운동이 상당히 큰 규모로 진행됐음에도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포항의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살펴보죠..

◆ 이상준> 예, 포항면의 3·1운동은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와 포항교회에서 운영하는 영흥학교 교사들에 의해 주도됐습니다. 포항교회는 일찍이 대구 남성정교회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와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로서 대구 3·1운동을 이끈 남성정교회와 같은 계파의 교회입니다. 남성정교회 목사인 이만집이라는 분이 같은 선교사가 개척한 포항교회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동참할 인물들을 물색하다가 포항교회 장로로 있던 최경성과 송문수를 영입하게 된 것입니다.

최경성이라는 분은 나이가 20살 되던 1903년에 남성정교회에 다니게됩니다. 2년 후인 1905년 포항으로 이사하게 됨에 따라 포항교회로 옮기면서 이만집 목사와는 각별한 친분이 있었죠. 또 한분이 계셨는데 송문수 장로라는 분은 19세에 포항교회에 다니다가 특히 1913년 봄에 대구 남성정 교회에서 운영하던 대구성경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래서 대구의 이만집 목사와는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경성과 송문수는 함께 대구의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이 주동자가 되어 포항의 3·1운동을 이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포항교회에서 만든 영흥학교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영흥학교 교사들이 3.1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죠.

◇ 유상원> 포항교회, 지금의 포항제일교회 신도들, 또 영흥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3.1운동이 시작됐군요.. 이분들이 어떻게 만세운동을 벌였나요?

◆ 이상준>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포항동에 있던 송문수가 같은 교회 장로인 최경성과 같이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있었던 대구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최경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구속되었고, 송문수는 잡히지 않고 3월 9일경 포항으로 피신해 왔습니다.송문수가 포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영흥학교 교사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1명이 송문수의 집으로 찾아가 그에게 대구부에서의 시위운동 상황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송문수는 이들을 포항동 남쪽 끝의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애국지사들이 조선의 독립을 계획하고 있고, 현재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운동에 관한 서면을 제출하려고 고종황제로부터 날인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이완용이가 거절하였고, 그 후 왕은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다. 당시 조선인 현모씨가 위와 동일한 취지의 서면을 작성하여 예수교 교회의 날인을 받아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한 결과 그 파리강화회의에서 오는 3월 28일까지 조선인민이 소요하고 있으면 세계 만방이 조선의 독립을 허용해야 할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각지에서 인민이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해 줍니다. 그러면서 송문수는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을 설득해서 포항에서도 대구부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시위운동을 하자고 제의했죠. 송문수의 말을 들은 장운환 외 3명이 즉시 같이 동참하겠다고 의사를 밝히고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 유상원> 송문수라는 분은 그 당시에 서울이나 대구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네요...

◆ 이상준> 맞습니다.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거기 가서 다 듣고 온 것이죠. 독립운동 해야 하는 목적, 그리고 독립선언서도 갖고 왔죠.

◇ 유상원> 그렇게 해서 드디어 포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는데, 날짜가 3월 11일, 이날이 장날이었다구요?

◆ 이상준> 맞습니다. 포항장날이 3월 11일입니다. 이기춘과 이봉학은 송문수를 만난 다음날인 10일부터 포항에서 김동은 외 여러 명에게, 이 김동은이라는 사람은 포항에 유명한 청년입니다. 이 분이 나중에 영일청년회를 조직하는 분인데, 이 분 외 여러명에게 송문수로부터 들은 바를 전하고 함께 동참할 사람들을 모집했지요. 이들은 송문수가 갖고 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벽보첩지를 만들고, 시위 때 군중들에게 나누어줄 선전문까지 인쇄하는 등 모든 준비를 완료했죠.

그런데 이런 사실들이 일본 밀정에게 탐지되었고, 이틀만인 11일에 주동자 4명이 모두 일본 관헌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보안법위반인데, 이들은 미수범임에도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만큼 포항 3·1운동이 지역 정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송문수 등의 판결문상에 보면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외 1명’ 이렇게 나오는데, 보통 정확한 실명을 쓰지 ‘외 1명’ 이렇게는 안쓰는데, 이 사람이 일본의 밀정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모자들이 거사일 전에 미리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리가 없고, 판결문에 적시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임에도 그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 유상원> 그렇군요 그럼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외 1명’의 신분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인가요?

◆ 이상준>그렇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 연구를 해서 찾아내야 될 부분이죠.

◇ 유상원>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참여자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금요일에 세 번째 순서 갖도록 하죠. 이상준 향토사학자였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이상준>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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