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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취재일기]아직도 일본 판사에게 재판받던 시절을 답습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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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판사들 검찰 조사 받고 나니…

"이렇게 쓰인 조서, 증거력 인정 못해"

우리나라가 유일, 일제시대 재판 관행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한 판사는 "검찰 조서를 믿고 재판했던 과거를 반성했다"고 말했다. 참고인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던 그 판사는 "검찰은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식으로 나왔고, 원하는 답을 하지 않으면 '피의자 전환 가능성'을 시사하며 압박했다"며 "검찰 조사를 받는다는 굴욕감만큼이나 그 동안 내가 검찰 조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검찰 조서는 경찰의 것과 달리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된다. 증거에 대한 판단은 판사의 몫이지만, 존재 자체로 증거력이 있는 셈이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 312조에 따르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 조서는 고문이나 회유 등 적법하지 않은 과정이 없었을 경우 증거 능력이 인정된다. 재판 때 피고인이 조서 내용을 부인한다고 해도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과 조서가 동일하게 기재됐음이 영상녹화물 등 객관적인 방법에 의해 증명된다면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반면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재판에서 그 내용을 부인하면 증거로 쓸 수 없도록 돼 있다.

최근 법원에서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여전히 형사 재판에서는 검찰 조서가 유·무죄를 가르고 양형을 결정하는 주요 증거로 사용된다. 한 고법 판사는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야 그나마 공판중심주의가 적용되고, 대다수의 형사 사건에서는 검찰 조서를 그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 조서에 기록됐던 말과 다른 발언을 하면 '말을 번복한 사람'이 돼 오히려 피고인에게 불리하다는 변호사들도 있다.

검찰 조서에 이처럼 막대한 영향력을 부여하는 건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국회입법조사처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신문할 때 조서를 작성할 의무가 없고 조서의 증거능력에 관한 규정도 별도로 마련돼 있지 않다. 독일은 피고인 또는 증인을 공판정 내에서 직접 신문해야 하고, 공판정 외에서 신문한 내용이 담긴 조서나 기타 서면을 낭독하는 것으로 직접신문을 대체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공판직접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중앙일보

일제강점기 때 법정 모습.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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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검찰 조서에 증거력을 부여하기 시작한 이유는 일본 강점기 판사들이 다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판사들은 조선말을 몰랐기 때문에 당시 검사가 만들어 온 조서에 증거 능력을 인정해줬다. 정작 일본은 최고재판소 격인 대심원에서 1982년 "현행범이 아닌 피의자에 대한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결했다.

이 때문에 검찰 조서의 증거 능력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법조계 안팎에서 끊임없이 지적돼 왔다. 국회에서도 2016년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와 관련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검사가 작성한 조서도 경찰 등 다른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와 마찬가지로 재판에서 피고인이 그 내용까지 인정해야 증거능력이 인정되도록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당시 국회가 검토한 보고서에 따르면 " 조서재판의 폐해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공판중심주의를 구현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판단된다"고 돼 있다.

지법의 한 판사는 "지금까지 검찰 조서를 가장 필요로 했던 집단이 아마 판사들일 것"이라며 "정작 판사들이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제 분위기가 많이 바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검찰 조사의 '당사자'가 되어 봤기 때문이다. 또 다른 판사는 "검찰이 수사를 확실히 하고 조서를 보면 사건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경우도 많았다"며 "하지만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려는 한 당사자의 주장을 지금까지 법원이 지나치게 의심 없이 바라본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의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검찰의 수사가 법원의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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