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시의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은 `만삭 위안부` 사진으로 잘 알려진 고(故) 박영심 할머니가 수난을 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 세워졌다. 진열관 2층의 위안부 추모 부조 `멈추지 않는 눈물(Endless Flow of Tears)`에선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도 새 눈물이 흘러내린다. [난징 = 이승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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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文子), 추자(秋子), 정자(正子)….'
위안부를 '선택'하는 명패 10여 개가 1층 프런트에 걸려 있었다. 일본군이 실제 사용한 것과 동일한 콘돔, 연고도 보존 진열된 상태였고 녹슬지 않은 산부인과 시술도구까지 전시돼 있었다. 지난달 29일 방문한 중국 난징시의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유적 진열관'엔 복제품이 없다. 모두 진짜다. 경악하기에도 버거워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똑바로 쳐다봤다. 나라 잃은 백성의 지옥도가 바로 여기였다.
전날 밤 10시께, 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께서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흰 카네이션을 준비해 정문에 들어섰다. 중국판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위챗'의 QR코드로 접속하면 한국어 설명이 나온다고 경비원이 안내했다. 위챗으로 접속하자 일본어도 선택 가능했다.
'19번 방' 앞에 멈췄다. 한국인 위안부 고 박영심 할머니가 수난을 당했던 바로 그 방이다. '만삭 위안부' 사진의 당사자인 박 할머니를 기리는 안내판부터 눈에 띈다. 1m 간격인 건너편 26번 방엔 위층 다락방으로 통하는 목조계단도 눈에 띈다. "일본군에게 저항하던 박 할머니를 가뒀던 골방"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위안부 제도를 고착화했다. 중국에 설치된 위안소는 중국 20여 개 성(省)과 시(市)에 분포돼 있었다. 중국 여성 20만명이 '성노예'로 학대받았다. 진열관 출구에 다다르면 일제에 희생당한 바로 그 동아시아의 수십만 여성을 기리는 '멈추지 않는 눈물(Endless Flow of Tears)' 청동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국·한국·대만에서 왔음 직한 위안부 할머니의 얼굴 부조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상 아래 마련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드렸지만 턱에 두 방울의 눈물이 금세 맺혔다.
한국에서 왔다는 소식을 들은 리우구앙지엔 사학연구원이 다가와 김복동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물었다.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가 몇 명 남았느냐'는 질문에 "이제 23명"이라고 답하자 "중국 위안부 생존자는 이제 13명 남았다.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추모 동상에 카네이션을 내려놓고 함께 고개를 숙였다.
'난징대도살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징대도살은 '난징대학살'의 중국식 표현으로, 1937년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이 버리고 떠난 당대 수도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도륙된 30만명 학살사건을 일컫는다. 뒤집힌 검은 배 모양의 기념관은 도시에 정박된 채 인간성의 침몰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10개의 청동상은 입구부터 눈물겹다. 현 중국국가미술관장 우웨이산 난징대 교수의 2007년 연작이다. 아기를 품에 안고 질주하는 여성, 죽은 아이의 눈을 감겨주는 성직자, 사망한 엄마의 젖을 빠는 갓난아이의 모습이 난징의 비명을 가득 품고 있다.
기념관 내부에 들어서자 온통 어둠뿐이었다. 지하 1층 대형 스크린에선 수만 개의 이름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1초, 2초…12초.'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난징 시민들의 '죽음의 간격'을 뜻했다. 난징대학살에서 12초마다 한 명씩 죽어 나갔다는 뜻이다. 희생자가 35만명이란 추정치도 있다. 일본은 학살은 없었다고 부정했고 때로는 전시에 벌어진 악의 불가피성을 옹호해 왔다.
2ℓ들이 생수통 2~3개 크기 유리병의 흙더미는 '지옥의 유물'이었다. 유골 발굴 당시 채집한 흙이다. 병 내부에 거미, 지네가 아직도 기어 다녔다. 숫자 '1300'이 단번에 눈에 띄었다. 학살지 한 곳에서 죽은 영혼이 1300명이란 사실을 깨닫자 옆 유리병에선 숫자 '9721'이 눈에 띄었다. 점입가경이었다. 그 옆 유리병으로 고개를 돌리자 '三万三千(3만3000명)'이란 한자가 또렷했다.
무지개 빛깔 종이학 수만 마리가 출구의 탁자를 장식하고 있었다. 일본의 수십 개 단체가 보내 온 종이학이었다. 도쿄도 전국지부 교육자협의회, 무라사키 바나나 합창단 등의 자필이 리본에 적혀 있었다. 먼 땅의 일부는 악을 참회 중이었으나 이 도시는 여전히 고통과 동거 중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양쯔강의 검은 진흙을 내려다봤다. 안개가 짙은 강변에서 낚시꾼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양쯔강가 진흙더미 10㎞ 구간에, 태워지다 연료조차 아까워 버려진 난징의 시체가 10만명이란 통계가 스쳤다. 진한 물비린내 사이로, 피비린내가 훅 끼친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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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 김유태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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