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6 (일)

[나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약속은 약속” “사람부터 살아야지” 입장 팽팽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유전자원보호구역 임시로 풀어

올림픽 때 사용한 알파인스키장

주민들 곤돌라 등 일부 보존 요구

연 12~13억 운용비 군에서 대기로

원칙 지키던 정부 사회적 대화키로

주민대표 참여해 21일 3차 회의

평창올림픽 스키장 가리왕산의 복원 갈등

중앙일보

지난해 동계올림픽 알파인스키 종목들이 열렸던 강원도 정선군 가리왕산 알파인경기장 전경. 약속대로 전면 복구해야 한다는 산림청과 곤돌라 등 일부 시설을 남겨달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맞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1일 오후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알파인경기장 입구. 가리왕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수선했다. 입구에서 바라본 스키장 바닥에는 커다란 돌덩어리가 가득했다. 스키장인지 채석장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스키장 입구 수백m는 주민들이 쳐놓은 가시철조망으로 차단돼 있었다. 그 위로 알파인경기장 철거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이 걸어놓은 현수막 수십 개가 빼곡했다. ‘곤돌라·운영도로 군민이 사수한다’ ‘가리왕산 훼손한 산림청이 유전자 보호 웬 말이냐’ 등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주민들이 갖다 놓은 파란색 컨테이너 세 개의 몸체와 유리창에도 자극적인 구호들이 가득했다. 주민들은 지난해 12월부터 석 달째 이곳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주민들의 허락을 얻어 스키장 위로 걸어 올라가 봤다. 결승선과 관중석이 있었던 하단부까지 가는 300여m 구간은 온통 돌밭이었다. 그 위로 총연장 4.7㎞인 관리도로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고 있었다. 멀리 하봉에서 내려오는 스키장이 보였지만 ‘출입 금지’ 표지가 앞을 가로막았다.

김진표 북평면번영회 부회장은 “원래 계곡이었지만, 스키 코스를 조성하며 35만t의 흙과 돌을 채워 넣어 이렇게 됐다”며 “높은 곳을 깎고 아래를 메웠는데 100% 완전 복원이 가능하겠느냐”고 말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세 계절이 흘렀지만 이 돌밭엔 나무 묘목이나 풀이 자란 흔적이 전혀 없었다. 군데군데 돌과 흙을 쌓아 놓은 곳엔 빗물이 흘러 패인 자국이 가득했다. 한때 선수와 관중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던 스키장은 이제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불모의 땅이 됐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스키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해발 1560m인 가리왕산 일대는 산림청이 지정한 유전자원보호구역이었다. 상봉, 중봉, 하봉 등 세 봉우리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과 거제수나무, 물박달나무 같은 희귀식물 100여 종이 가득했다. 정상 부근엔 사방의 푸른 산이 파도처럼 밀려온다고 해 벽파령(碧波嶺)이란 고개가 있다. 태백산맥의 한가운데에 있는 산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이름이다.

중앙일보

정선 알파인경기장 철거반대 범군민투쟁위원회가 지난 7일 경기장 입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데 동계올림픽을 치를 알파인스키 경기장이 마땅치 않았던 게 문제였다. 개최지 평창과 강원도를 다 뒤져도 고도와 경사도 면에서 국유지인 가리왕산을 따를 곳이 없었다. 위치도 평창과 가까웠다. 2013년 동계올림픽조직위와 강원도는 환경단체 등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을 알파인스키 경기장으로 확정했다. 이곳을 관리하던 산림청은 ‘2018년 연말까지 원상복구’를 조건으로 강원도에 국유지 점용허가를 내줬다. 조직위와 강원도는 2000억 원가량의 예산을 들여 이곳을 올림픽 경기장으로 만들었다.

다행히 올림픽은 성공했다. 악화일로로 치닫던 북한과의 관계도 개선 흐름으로 반전돼 ‘평화 올림픽’이 됐다. 하지만 원상복구 기간이 한 달 이상 지났어도 가리왕산은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중단된 공사 현장처럼 허물어져 가며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주민과 정부 간의 힘겨루기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정선군에선 161개 단체가 모여 ‘알파인경기장 복원반대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면 복원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들이 알파인스키장은 물론 정선읍 내에도 수백 개씩 내걸려 있다.

중앙일보

알파인경기장 입구에 철거반대 범군민투쟁위원회가 내건 현수막들이 수십 장 붙어 있다. [나현철 기자]


이들의 요구는 관리도로와 곤돌라를 뺀 복원이다. 산 정상에 전망대나 공연장을 세우고 곤돌라로 등산객과 관광객이 편히 오가게 되면 관광이 활성화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김진표 부회장은 “원래 산 아래 있던 35가구가 철거돼 마을이 없어졌다”며 “대체부지로 옮긴 11가구를 뺀 나머지는 일용직 등으로 생계를 전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재철 정선군 의회 의장은 “관리도로와 곤돌라는 스키장 전체 면적 중 1.5%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며 “어차피 완전복구는 어려우니 살아갈 길을 열어 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선군은 연간 운영유지비용 12~13억 원가량을 들이고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면 몇 년 뒤부터 충분히 흑자를 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유지비용은 강원랜드에서 나오는 수입 등 자체적으로 충당해 중앙정부에 손을 벌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스키장 부지가 40여년 전 벌채장으로 쓰였기 때문에 환경적 가치가 크지 않으리라는 점도 주민들이 강조하는 점이다.

동계올림픽 효과에 대한 지역적 아쉬움도 적지 않은 듯했다. 올림픽을 치르며 평창·강릉엔 KTX가 신설됐다. 강릉역 부근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도로도 많이 났다. 하지만 ‘정선엔 길 하나, 다리 하나 새로 놓이지 않았다’는 게 주민들의 전언이다. 정선군민들이 KTX를 타려면 가까운 진부역까지 30분 남짓을 가야 한다. 최승준 정선군수는 “1990년대까지 정선인구가 14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3만7000명으로 급속히 줄고 고령화도 빠르다”며 “어린애부터 80대 노인까지 전 국민이 20년을 노력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는데 유일한 상징물인 알파인스키장까지 철거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인식이 주민들 사이에 퍼져 있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올림픽 일주년 기념식이 열린 지난 9일 상여를 메고 기념식장에서 집회하려다 막판에 취소했다.

하지만 가리왕산을 관할하는 산림청은 여전히 원상복구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2013년 허가 당시 ‘올림픽 기념 등의 추가사업을 신청할 수 있다’는 단서가 있었지만 강원도가 신청하지 않아 원상복구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한다. 제 할 일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정선군의 반대를 이유로 일부 시설 존치를 요구하는 강원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산림청 권장현 산림자원보호과장은 “관리도로와 곤돌라를 유지하며 복원하려면 강원도가 예상하는 800억 원보다 많은 추가 공사비가 든다”며 “우리나라 고산지역 원시림을 대표하는 가리왕산을 전면 복구하는 게 현재로썬 유일한 답”이라고 말했다.

가리왕산을 둘러싼 갈등이 커지자 정부는 국무조정실에 사회적 대화를 위한 기구 설립을 서두르고 있다. 이미 두 차례 회의를 마쳤고 오는 21일 위원회 구성을 위한 3차 회의를 열 예정이다. 여기엔 산림청, 문체부는 물론 강원도와 정선군, 주민대표까지 참여시킬 계획이다. 강원도 관계자는 “올림픽 기념사업 신청을 못한 건 박근혜 정부 말기 문체부가 극도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라며 “사회적 대화 기구의 논의를 충실히 지켜보고 합의대로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최 정선군수는 “가리왕산의 법적 주인은 국가이지만 수백 년간 그 아래서 살아온 주민들의 정서적 권리도 무시할 수 없다”며 “부디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리왕산엔 먼 옛날 예맥의 가리왕, 혹은 갈왕이 타지에서 패한 뒤 부활을 위해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가리왕이라면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볼지 자못 궁금하다.

나현철 논설위원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