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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판사 과로사, 외교관 뇌출혈···여성 엘리트들이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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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30·40 전문직 여성 목숨 노리는 '일·육아 이중고'

판사·사무관 과로사, 외교관 뇌출혈

일과 가정 양립부담 떠안다 쓰려져

여성 국회의원·여교수도 마찬가지

임신·출산·육아 나홀로 부담 많아

한국은 뿌리깊은 남성위주 사회

워킹맘은 보직·승진기회 배제돼

양성평등 원칙 철저하게 지키고

워킹맘이 만족할 대책 제시해야

전문직 워킹맘들 "과로사 남일 아니다"


지난달 19일 오전 4시쯤. 서울고등법원 소속 이승윤(여·42·사시 42회) 판사가 자택 안방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 부검에서 외상이 없었고 뇌출혈이 사인으로 추정됐다. 경찰과 대법원 등에 따르면 이 판사는 숨지기 약 열흘 전에 시부상을 치렀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해 숨진 월요일 새벽까지 판결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앞서 지난달 16일 오전에는 싱가포르의 한 호텔 방에서 김은영(여·48·외시 28회) 외교부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김 국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아세안 및 아·태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수행 중이었다.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과로로 보인다"는 글을 올렸다. 앞서 지난해 1월에는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건물 6층 계단에서 김선숙(여·당시 36·행시 50회) 사무관이 심정지로 숨진 채 발견됐다. 2015년에도 서울남부지법에서 두 아이를 키우던 30대 여판사가 과로사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과로사와 돌연사라고 하면 40·50 중년 남성 가장이 주된 피해자였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참여가 확대되고 맞벌이 가정(배우자 있는 가구의 44.6%)이 급격히 늘면서 덩달아 과로로 쓰러지는 여성이 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과로사가 고소득 전문직 엘리트 워킹맘에게서 잦아지고 있다.

중앙일보

문재인 대통령(사진 한가운데)이 지난해 8월 25일 보건복지부 청사를 방문해 직원들을 위로했다. 앞서 그해 1월 세자녀를 키워온 30대 워킹맘인 복지부 여성 사무관이 과로로 숨졌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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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육아의 이중고=숨진 이 판사와 김 사무관, 병상에 있는 김 국장의 공통점은 고시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란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10여년의 전문직 경력을 쌓아 맹렬하게 일하면서 육아를 함께해온 '워킹맘'이라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이승윤 판사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이 있다. 이 판사는 숨지기 한 달 전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동료 판사들과의 인터넷 카페에 "예전엔 밤새우는 것도 괜찮았는데 이제 새벽 3시가 넘어가면 몸이 힘들다. 이러다가 내가 쓰러지면 누가 날 발견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최완주 서울고등법원장은 영결식에서 "업무 부담이 과중해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김 국장은 지난 3월 여성 외교관으로서는 사상 처음 외교부 지역 국장에 발탁될 정도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외교관인 남편과 맞벌이하며 초등학생 아들을 키워왔다. 동료 외교관은 "남아시아태평양국은 인원에 비해 관할 국가와 업무가 방대하다"며 "매년 준비해야 하는 정상회담과 국제회의 일정이 많아 김 국장이 거의 매일 진통제를 먹으며 일할 정도로 과로했다"고 전했다. 한 달째 싱가포르 병원에 누워있는 김 국장은 다행히 최근 의식을 다소 회복했다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상태를 봐서 조만간 에어앰뷸런스로 국내에 호송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한 동료 외교관은 "(김 국장은) 누구보다 책임감과 업무 의욕이 강한 완벽주의자였다"면서 쾌유를 빌었다.

복지부 김 사무관은 세 자녀를 키우는 맞벌이 워킹맘이었다.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김 사무관은 숨질 당시 쟁점으로 떠오른 의료수가 개선 정책을 챙기려고 토요일에도 새벽에 나가 3시간가량 일했고 일요일에도 출근했다고 한다. 휴일을 반납하며 일하다 쓰러진 것으로 주변에서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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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임기 중 사상 처음 출산휴가를 사용한 신보라(왼쪽 둘째)의원이 9월에 출산한 아들을 안고 보좌관 및 비서진들과 워킹맘의 육아 대책 법안을 화제로 대화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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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 '알파 걸'들=유능한 워킹맘들이 잇따라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맞벌이 여성들은 "일과 가정의 경계를 외줄 타듯 오가다 일순간에 쓰러진 것 같다. 과로사가 남의 일이 아니다"며 입을 모았다. 검사 출신의 40대 여성 변호사는 "공판부 검사 시절에 여판사들이 토요일 밤 11시가 넘어 전화를 걸어 월요일 있을 재판에 대해 문의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민사보다 형사 사건을 다루는 여판사들이, 고등법원에서 오래 일하는 여판사들이 더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했다.

워킹맘 여검사들의 근무 환경에 대해 그는 "주변에 과로로 유산한 여검사가 많고 과로와 스트레스로 면역기능 장애가 온 사례도 많다. 크고 작은 병으로 아프지 않은 여검사가 별로 없다"고 전했다.

경력 10년이 넘은 서울의 한 법원 여판사는 "2015년에도 30대 여판사가 아이 두 명을 혼자 키우다 과로로 숨졌다"며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유연근로제 등 뭔가 대책을 만들지만, 근본적인 개선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은영 국장의 선배 여성 외교관은 "여자 외교관들은 실수하지 않아야 하고 남자 동료보다 잘해서 실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더 크다"며 "전업맘보다 아이들을 잘 챙기지 못한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워킹맘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자라면서 전문직 워킹맘들의 업무 부담도 동시에 커진다"며 "나 자신도 과장 시절에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이러다 나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고 토로했다.

뉴스에 나오지 않았을 뿐 사회 각 영역에서 쓰러지는 전문직 워킹맘들은 적지 않다. 모 대학 여교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가 나보다 먼저 떠난 여성이 주변에 많다.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정말 아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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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8월 25일 보건복지부를 방문해 과로사로 숨진 워킹맘 사무관의 죽음과 관련해 "복지부 공무원들의 복지도 책임지지 못하면 국민 복지를 어떻게 책임지겠느냐"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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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남성 위주 사회"=일과 가정의 병행에 따른 부담을 느끼는 전문직 여성들은 남성중심 사회가 아직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검사 출신 여변호사는 "여검사들이 늘어나는데도 서울중앙지검 등의 요직은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남는 일부 자리를 놓고 여검사들끼리 경쟁하는 구조"라며 "이러다 보니 여검사들끼리 실적 경쟁이 과열되고 심지어 여검사 선배가 다툼 끝에 여검사 후배의 뺨을 때리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모 대학 여교수는 "유능한 '알파 걸'들은 일과 육아만으로도 힘든데 주변의 무능한 '베타 남'들이 은근히 왕따를 시키거나 견제를 하는 경우가 있다"며 "남자들은 여성 동료가 출산하면 일 부담을 떠안을까 기피하고, 여자가 일을 열심히 하면 '애 엄마가 뭐 그렇게 죽기살기식으로 일하느냐'고 농반진반의 핀잔을 준다"고 말했다.

모 의대 부속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직 여성은 "한국의 기업 회식 문화가 기형적이라 남편의 비즈니스는 근무 시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이 많아 그 부담을 아내가 대부분 떠안는다"며 "남편이 회식하면 남편 회사가 맞벌이 아내의 퇴근 이후 시간을 사용하는 것인 만큼 남편 회사가 아내에게 초과근무 수당이라도 줘야 하는 것아니냐"고 주장했다.

고소득 전문직 여성을 무조건 기득권층으로 보는 시선도 비판을 받는다. 김영란 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문직 여성의 업무 강도는 전문직 남성과 동일한 수준이라 일과 가정의 양립이 다른 직종보다 더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전문직 여성은 고소득 집단으로 여겨져 이들이 느끼는 고통에 비해 사회적·정책적 관심이 적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여판사는 "출산·육아 등 가정을 챙겨야 하다 보니 승진을 위해 거처야 하는 주요 보직을 능력이 있어도 포기하는 여판사들이 있다"며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배려를 전혀 받지 못하고 온전히 각자가 떠안고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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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중 출산휴가를 사용한 신보라 국회의원이 9월에 출산한 아들을 안고 국회를 찾았다. 신 의원은 워킹맘들이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패키지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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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들의 '셀프 해법'은=전문직 여성들은 일·가정 양립 해법을 생존 차원에서 다각도로 고민하고 있다. 국회의원 임기 중에 임신·출산에 이어 육아를 경험 중인 신보라(35) 자유 한국당 의원(비례대표)은 당초 쌍둥이를 가졌으나 올 초 법안심사 때문에 사흘 연속 새벽까지 일하다 한 아이를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맞벌이 워킹맘인 신 의원은 이런 와중에도 지난 5월 난임 시술, 부부 동시 육아 휴직, 임신·출산 정보 제공 등을 담은 '행복한 육아 4종 패키지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신 의원은 "지난 9월 12일 환경노동위 전체회의를 소화한 다음 날 제왕 절개 수술을 받고 아이를 낳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 발의한 법안이 정기국회에서 논의되는 바람에 법정 출산 휴가(90일)를 53 일만 쓰고 다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며 4종 패키지 법안이 꼭 통과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은영 국장의 후배 여성 외교관은 "전반적으로 결혼 연령이 늦어지면서 커리어의 중요한 시기와 자녀 교육 피크 시기가 겹치는 것이 워킹맘들에겐 가장 큰 부담"이라며 "아직은 많이 부족한 국·공립 유치원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여성에 불리한 평가제도도 도마에 올랐다. 여검사 출신 변호사는 "육아 휴직을 내면 동료 검사 중에 고과를 제일 낮게 주다 보니 여검사는 구조적으로 승진에 불리하다"며 "연년생을 출산한 모 여검사의 고과가 3년 연속 꼴찌로 나오자 감찰이 나오는 소동이 있었지만 결국 그 여검사가 매우 유능한 검사라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해프닝도 있었다"고 전했다.

경력 10년을 넘은 한 여판사는 "서울에서 10년 이상 근무하면 약 3년 정도 지방 근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다 보니 출산·육아를 더 힘들어해 한다. 스마트 워크 센터를 확충해서라도 탄력적인 근무가 가능하게 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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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8월 25일 보건복지부를 깜짝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복지부는 지난해 워킹맘 사무관의 과로사 이후 휴일근무 폐지를 약속했지만 흐지부지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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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원칙 지켜야=불필요한 일을 줄여나가면서 부족한 인력은 대폭 확충해야 출산·육아에 따른 휴직에 그나마 숨통이 생길 수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약 670만여 건의 소송이 제기돼 지방법원 법관 1명이 평균 675건을 처리했다. 특히 사건이 많이 몰리는 서울중앙지법의 법관 1인당 사건수가 2012년(905.7건)에 비해 지난해 1233.9건으로 증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200~400건 수준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캐나다·스페인보다 한국의 외교관 수가 적은데 외교 업무 수요는 계속 늘고 있다"며 "OECD 평균 수준이 되려면 현재(약 1800명)보다 400~500명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진영 교수는 "워킹맘들은 '내가 전업맘보다 아이들에게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주변으로부터 심리적 압박을 받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매달려 살다간 진짜 쓰러질 수도 있다. 한국의 워킹맘들은 이런 죄책감을 과감히 벗어던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성평등 원칙의 뿌리를 철저하게 내리도록 하는 사회문화적 토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웨덴의 경우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한손에 유모차를 끄는 '라테 파파'가 흔할 정도로 육아는 철저하게 양성평등 원칙에 따라 부부가 분담한다. 이정규 주스웨덴 대사는 "직장에 지나치게 올인하는 문화에서 탈피해 스웨덴처럼 삶의 가치를 다양하게 추구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문제는 이런 다양한 대책 논의가 금세 흐지부지된다는 점이다. 복지부는 지난해 김 사무관이 과로로 숨진 이후 일과 가정 양립 대책 중 하나로 휴일근무를 폐지했지만 사실상 흐지부지 되는 분위기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 위원회는 지난 7일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며 거창한 로드맵을 발표했다. 워킹맘들이 자신의 삶에서 이를 공감하지 못한다면 탁상 위의 정책은 곧 공염불이 될 것이다.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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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변은샘 인턴기자가 이 기사의 디지털 영상 편집작업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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