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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남기고 싶은 이야기] 과외 제자의 누나였던 여친, 내가 탄 비행기 보며 남몰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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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61)

1박2일 걸려 도착한 미국

새 국제공항이던 김포공항에서

가족·친구 환송 받으면서 출국

결혼 전이던 부인 먼발치 배웅

피난학교 등 어려운 시절 떠올라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 핑

마음 다잡으며 유학 비행기 올라

중앙일보

1960년 개장한 김포국제공항 종합청사. 정근모 박사는 60년 3월 이곳을 통해 가 유학길을 떠났다. 당시로선 최신 시설이었다.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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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한 뒤 다시 물리학 전공으로 돌아간 나는 1960년 3월 김포국제공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공항은 지금은 국내선 중심에 일부 국제선만 운항하지만, 당시엔 최신 시설이었다. 58년 초 여의도공항으로부터 국제공항 임무를 넘겨받았다. 16년 건설돼 해방 뒤 대한민국 관문 역할을 하던 여의도공항은 이후 군사전용으로 전환했다가 71년 폐쇄됐다. 현재 여의도공원과 KBS 등 방송사, 그리고 한국거래소를 비롯한 금융사들이 들어선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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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17일 이승만 대통령과 조용순 대법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김포국제공항 종합청사 준공식이 열리고 있다. 김포공항은 한 해 전 여의도 공항으로부터 국제공항 자리를 물려 받았다. 3.15부정선거 한 달 전, 4.19 학생혁명 두 달 전의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김포공항 종합청사는 60년 2월 17일 이승만 대통령과 조용순 대법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돼 당시로선 최신 시설이었다. 이곳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환송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의 격려 속에 유학길에 오르니 감개무량했다. 초등학교 마지막과 중학교 초기를 다녔던 6·25 당시 천막 교실을 비롯해 어렵게 공부했던 장면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한없이 나를 격려하고 보살펴주시다 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 대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도 생각났다. 당시 미국 유학은 큰 기회였다. 단단히 마음을 다잡으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끝없이 다짐했다. 우리 세대는 대부분 이런 마음으로 유학길에 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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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여의도공항의 모습. 1916년 건설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관문 노릇을 하다 1958년 김포공항에 국제공항 지위를 넘겨줬다. 지금 여의도 공원과 KBS, 금융가 등이 있는 여의도의 한복찬이다.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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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62년 결혼한 부인 길경자씨)가 먼발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처는 사실 내가 학생 시절 가정교사를 하던 집의 딸이다. 지금 처남을 가르치다 그 누나와 친해졌다. 여자친구는 이륙하는 비행기가 보이는 공항 난간에서 혼자 울고 있었는데 마침 배웅 나왔던 내 친구가 우연히 이 모습을 보곤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나중에 판사로 일하다 90년대 초 대구고등법원장과 사법연수원장을 지낸 고교 동창 김재철(79) 변호사가 바로 이 친구다. 당시는 교제 사실 공개를 꺼리던 시절이라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주변에선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공항에서 어떤 젊은 여성이 하도 슬프게 울고 있기에 친구가 혹시나 하고 사진을 찍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58년 전 공항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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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7월 5일 열린 김포공항 환수식. 미군 제5공군으로부터 공항관리권을 넘겨받았다. 단상 위 왼쪽부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윤보선 대통령,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앉아있다.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진 지 두 달이 안된 시점이다.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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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을 이륙한 여객기는 영국항공(BA)의 전신인 영국해외항공(BOAC: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 소속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한국·미국 어느 곳의 항공사도 김포에서 출발하는 태평양 횡단 항공 노선을 운항하기 전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았다. 직항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중간에 하와이·샌프란시스코·시카고 등 세 군데에 중간 기착하거나 환승해야 했다. 최종 목적지인 미시간주 주도 랜싱에 도착한 때가 60년 3월 24일이었다. 비행과 공항대기 시간을 합쳐 꼬박 하루 반나절이 걸렸다. 1박 2일간 이동한 셈이다.

랜싱은 박사 공부를 시작할 미시간 주립대가 있는 도시다. 새로운 미래를 내 손으로 개척해야 할 바로 그곳이었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공항에 내리니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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