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1 (금)

"이케아 시대의 비참" 민낯 비춘 소설 '쇼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수림문학상 김의경 작가, 집·공간 테마 연작소설 출간

연합뉴스

김의경 작가
[연합뉴스�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우리 오늘 이 안에 숨어 있다가 자고 갈까? 이런 데서 하루만 살아 보고 싶어."

올해 수림문학상 수상자인 김의경(40) 작가의 신작 '쇼룸'(민음사 펴냄)에 담긴 단편 '쇼케이스'에 나오는 주인공 말이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동거하다 혼인신고를 한 10년 차 부부는 여전히 좁은 월셋집에 사는데, 작은 침대 하나를 사려고 이케아 매장에 왔다가 수십 개 화려한 쇼룸을 보고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가슴이 설레는 화려한 방이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색색의 사각 쿠션들이 놓인 푹신한 소파 뒤로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처녀'가 걸려 있었다. 은색 종처럼 생긴 천장 트랙 조명은 클림트의 그림과 벽면에 걸려 있는 다양한 그림 액자들을 비추었다. 당장이라도 젊은 화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와 그림을 그릴 것 같았다." (142쪽)

아내 '희영'은 결국 침대는 고르지 못하고 엉뚱하게 샹들리에를 비롯한 화려한 조명만 여러 개 사 온다. 그러나 조명을 설치한 뒤 불을 켜자 생활의 누추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천장에 단 조명은 태환의 낡아 빠진 행거와 누런 벽지를 더욱 선명히 보이게 했다.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행거에 걸린 옷들도 더 지저분해 보이는 것 같았다. 잡지의 카페 인테리어를 흉내 내어 부엌 상부장 앞에 단 조명은 곰팡이가 지워지지 않은 싱크대의 실리콘을 강조할 뿐이었다. 거실에 세워 둔 플로어스탠드 때문에 천장 구석에 거미가 만든 거미줄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잡동사니들도 더욱 두드러졌다. 샹들리에는 합성한 사진처럼 희영의 집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서랍장 대신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넣어 둔 속옷들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얼룩과 구멍이 더 커 보였다." (150쪽)

연합뉴스




이 소설집은 이케아의 화려한 '쇼룸'을 주요 테마로 한 연작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끝없이 소비와 소유 욕망을 부추기는 쇼룸과 그에 대비되는 현실의 민낯, 특히 집과 공간의 풍경을 예리하게 그린다. 현실이 비참하기에 화려하게 진열된 쇼룸과 상품들은 욕망과 환상을 더욱더 간절하게 부풀린다.

소설 8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생활고에 시달리며 꿈이나 사랑 같은 관념조차 잃어버린 이들이다. 번듯한 집은커녕 온전한 방 한 칸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린다. 유럽이나 영미권에서는 합리적이고 저렴한 브랜드로 대표되는 이케아 가구들이 이들에게는 사치품이다. 가구 한두 개야 그럭저럭 살 수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쇼룸처럼 놓을 집,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큰 소비가 어려운 이들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탐닉하는 쇼핑공간이 바로 다이소다. 소설집 맨 앞에 실린 단편 '물건들'에는 수시로 다이소에서 1천∼5천원짜리 물건들을 사며 우울함을 달래는 가난한 연인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초라한 옷차림으로 백화점 매장에는 들어가기도 뭣했지만 다이소에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하나씩, 천천히 물건들을 들여다봤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은 다이소에 들렀는데 물건을 사지 않고 나올 때도 많았다. 아이쇼핑을 하다 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적인 엷은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쪽)

소설 화자는 결혼한 친구들의 귀여운 아기를 보며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지만, 몇 년간 동거해온 남자친구에게 얘기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다. 결국 더 이상 다이소 쇼핑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때쯤 이들의 연애도 서글프게 막을 내린다.

연합뉴스




이 책에 작품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 '쇼룸' 속의 인물들은 훨씬 더 높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수준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소 수준의 생존과 생계를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로 하여금 가능성 외의 더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과연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유예하고, 미루도록 하는 힘의 실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힘의 실체를 탐색해야 한다. 김의경의 '쇼룸'은 그 탐색의 과정이자 재현이며, 우리가 어느새 무디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재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작가 김의경은 우리가 누려 마땅할 매우 기본적이며, 인간적인 권리마저 스스로 포기하는 세상에서 과연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며 "의존할 수 있는 거대 서사가 사라진 지금, 이케아 시대의 비참을 보여 줌으로써, 김의경은 '행복'의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뒷면, 맨얼굴을 보는 게 첫 번째의 일이라면, 그 맨 앞에 김의경의 소설이 있어 마땅할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작가는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 '콜센터'로 지난달 제6회 수림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당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곧 출간될 소설집 '쇼룸'을 소개하며 "내가 계속 반지하 방을 전전하다 보니 공간에 대한 집착이 생겨서 이케아를 배경으로 소설까지 쓰게 됐다. 상금(5천만원)은 전세 보증금에 보태려 한다"고 말했다.

min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