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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칼이 된 말' 증오·적개심 초래… 뒤틀린 표현의 자유 [행복사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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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갈등 부르는 ‘혐오語’/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워마드’ 논란 / 소수·특정층 비하 사회적 문제로 부상 / 성인 81% “성별 따른 혐오 표현 심각”

세계일보

‘김치녀’(한국여성을 비하하는 표현), ‘한남충’(한국남성을 비하하는 표현), ‘틀딱충’(틀니를 딱딱거린다는 뜻으로 노인을 비하하는 표현), ‘맘충’(일부 개념 없는 아이 엄마를 비하하는 표현)….

최근 한국사회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혐오표현은 신조어를 넘어 일상에서 익숙한 표준어처럼 쓰이고 있다. 혐오표현은 대상을 쉽게 규정한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이다. 하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따라 규제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최근 혐오표현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면서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의조차 내려지지 않은 ‘혐오표현’

혐오표현은 역사가 길지만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12년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가 등장하고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9일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28.5%는 성별에 따른 혐오표현이 ‘매우 심각하다’고 답했다. ‘약간 심각하다’고 답한 비율은 52.2%로 절반을 넘었다. 연령별로 20대의 48%가 ‘매우 심각하다’고 답했다. 40대(22%)와 50대(14%)보다 더 크게 심각성을 느꼈다. 또 응답자의 75.6%는 ‘김치녀’ ‘한남충’ 등의 혐오표현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 53.2%는 혐오표현을 ‘한 번도 써본 적 없다’고 답했고, 35.1%는 ‘거의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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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은 것에 반해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적·법리적 정의는 분명하지 않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혐오는 ‘미워하고 꺼림, 싫어하고 미워함’을 뜻한다. 하지만 혐오와 혐오표현은 다르다. 가령 초록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록색이 싫다”고 말하는 것은 혐오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이슬람에게 “차도르가 싫다”고 말한다면 혐오표현이 될 수 있다. 이슬람이 소수인 한국사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섣부른 언행이 비하나 무시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혐오표현 규제의 국제적 동향과 입법과제’ 보고서는 “혐오표현의 정의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 어려운 이유는 혐오라는 용어 자체가 가지는 불명확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혐오표현에 대한 정의는 관점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차별이나 폭력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비슷하다. ‘말이 칼이 될 때’의 저자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과)는 혐오표현을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에 근거해 소수자와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혐오표현 규제법안을 발의했던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개인 또는 집단이 갖고 있는 특성을 차별하거나 분리 구별 제한 배제하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차별 폭력 또는 증오를 선동 고취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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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에 정의가 분명하지 않은 탓에 또 다른 혐오 피해를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7월 여성주의 커뮤니티 워마드는 천주교 성체 훼손과 성당 방화를 암시하는 글로 논란을 빚었다. 해당 글에는 “천주교가 낙태죄 폐지와 여성인권에 반대한다”며 성체를 훼손한 이유가 적혀 있었다. 여성주의 단체들이 표방하는 일종의 ‘미러링’ 행위다. 하지만 이들의 미러링이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남성혐오, 또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사회학자는 사회적 약자가 행하는 행동은 혐오가 될 수 없다고도 주장하지만, 도를 넘어선 미러링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김원섭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혐오표현의 정의가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듯이 사회적 약자의 개념도 다르다”며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본권 훼손하는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 요소다. 헌법 제2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개인의 의견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며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다른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지닌 기본권을 훼손하는 경우다. 인종, 종교 등을 향한 혐오표현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정치적 입지가 다수와 다름에 따라 일반적인 혐오표현보다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혐오표현이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유발한다고 해서 표현의 자유 자체를 제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혐오표현이 단순히 기분 나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닌, 상대에게 차별이나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현행법에서는 타인의 언행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 모욕죄로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모욕을 당한 개인이나 단체가 특정되지 않는 경우 모욕죄를 적용하기 어려워 악용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치녀’ ‘한남충’ 등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경우다.

독일의 경우 혐오표현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혐오표현이 담긴 게시글이나 영상 등이 올라온 경우 사업자에게 삭제할 의무를 부과하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 최대 5000만유로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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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독일처럼 SNS 관련 기업들의 모니터링 의무와 불법정보 유통에 책임을 지우는 법안이 발의됐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발의한 ‘뉴노멀법’(정보통신망법·전기통신사업법·방송통신발전기본법 개정안)이다. 일각에서는 혐오표현을 넘어 차별을 막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최근 여성혐오가 화두지만 이전부터 노인혐오, 세대 간 혐오 등 혐오 문제는 심각했다”며 “어떠한 표현도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하는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궁극적으로는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인식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단순히 표현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근절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봉석 성균관대 초빙교수(사회학)는 “혐오표현은 고의적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혐오인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도 많다”며 “오히려 무의식에서 나오는 혐오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만큼 그런 부분에 대한 교육과 개선노력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구성·김청윤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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