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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배명복 칼럼] 민족적 열망, 그 과도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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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외교 성공한 문 대통령

평화·번영·통일 바라는

민족적 열망 이해하지만

지나치면 위험할 수 있어

민족은 매혹적이나 치명적

중앙일보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 결과를 누구보다 애타게 기다린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평양과 뉴욕으로 숨 가쁘게 이어진 2차 북핵 중재외교의 성패가 여기서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폼페이오의 방북 결과가 ‘빅딜(big deal)’인지 ‘스몰딜(small deal)’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한국의 중재외교로 북·미 협상이 탈선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도 시간문제가 됐다. 1차 중재외교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데 이어 이번에도 한국이 구원투수로 나서 북·미 교착 국면을 풀었다. 문 대통령은 중재외교에 자신감을 가질 자격이 있다.

지난달 뉴욕 방문 때 문 대통령은 자신 있는 행보로 주목을 받았다.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고약한 질문도 거침없이 받아넘겼다. 비핵화와 통일 중 무엇이 우선이냐는 ‘우문(?)’에 평화라고 대답한 대목은 인상적이었다. 평양 정상회담에서 거둔 성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전문성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게 청와대 주변의 얘기다. 서훈 국정원장 정도를 빼고는 문 대통령과 대등한 수준의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없다는 말도 들린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공부와 고민에 실전 경험이 보태져 상당한 ‘내공’이 쌓였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 말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다. 남북 간 평화는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으로 틀이 잡혔다. 어떤 경우에도 다시 전쟁은 하지 않겠다는 남북의 다짐이 두 선언이다. 양측 국방장관이 평양선언의 부속문서로 채택한 군사 분야 이행합의서는 전쟁을 막기 위한 군사적 실무 조치를 담고 있다. 평양선언이 사실상의 남북 간 종전선언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중앙일보

배명복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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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북·미·중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돼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핵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북한은 비핵화 의지를 밝히면서도 미국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신뢰 구축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첫 단계가 종전선언이라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한국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어떻게든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필요하고 중요한 까닭이다.

평화 다음으로 소중한 것은 공동번영이다.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의 적지 않은 부분이 남북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경제협력 조항으로 채워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제재가 풀려야 한다. 제재 완화를 위해서는 비핵화에서 실질적 진전이 이뤄져야 한다. 결국 ‘기-승-전-비핵화’다. 비핵화 없이는 평화도, 번영도 불가능하다는 절박한 상황 인식이 문 대통령을 중재외교로 내몰고 있다.

평화와 번영의 끝은 통일이다. 하지만 통일은 먼 얘기다. 두 나라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반드시 좋은지도 의문이다. ‘따로, 함께’ 사는 길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두 국가, 두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하며 협력해 통일에 버금가는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한국 주도의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북한을 붕괴시켜 흡수통일하자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오가고 교류·협력함으로써 동질성이 회복되고, 양측 수준이 비슷해지는 단계가 되면 통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평화·번영·통일로 가는 긴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민족적 열망의 과도한 분출이다. 그걸 자제시킬 책무가 있는 남과 북 지도자의 말에서 ‘민족자주’ ‘민족자결’ ‘민족단결’이 넘쳐나고 있다. 문 대통령은 15만 평양 군중 앞에서 “우리 민족은 우수하고 강인하며 평화를 사랑한다 …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산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며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7분의 짧은 연설에서 그는 민족을 아홉 번이나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평양선언을 채택한 뒤 “오랫동안 짓눌리고 갈라져 고통과 불행을 겪어 온 우리 민족이 어떻게 자기 힘으로 자기 앞날을 당겨오는가를 똑똑히 보게 될 것”이라며 민족적 열망을 전 세계에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남북이 힘을 합치면 주변 강대국도 움직일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한민족의 시원(始原)인 백두산에서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은 장면은 민족적 열망의 극적인 상징이었다.

진정으로 평화와 번영, 통일을 원한다면 주변국의 경계심을 자극할 수 있는 민족적 열망의 과도한 표출은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함께 섞이고 어울려 사는 다문화 시대에 혈연적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퇴행적이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수도 있다. 민족의 유혹은 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이다.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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