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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매경포럼] 당연함에 대한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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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결국 기업의 투자 촉진과 활력 회복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일 SK하이닉스 청주 공장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제8차 회의에서 한 말이다. 언론이 '문 대통령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기업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던 바로 그 발언이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이런 말도 했다. "정부는 기업의 활동을 촉진하고, 애로를 해결해 주는 도우미가 돼야 한다."

기업이 일자리 창출의 주역이고, 정부는 기업 활동에 도우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얘기다. 경제의 ABC와도 같지만 요즘 한국에선 이게 안 통한다. 기업이 꽁꽁 얼어 있는 동안 일자리 창출에는 정부가 앞장섰다. 그래서인지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 적지 않은 기업인들이 감격에 겨워했다. 이날 저녁 만난 기업인은 "이 간단한 얘기가 나오는 데 1년4개월 걸렸다"고 숨을 몰아쉬었다.

상궤를 벗어난 것은 경제정책뿐만이 아니다. 지난 5일 서울고등법원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날 판결로 신 회장은 234일 만에 석방됐는데, 개별 사건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판결문 한 구절이 회자되고 있다. "재벌그룹이라는 사정을 이유로 너그러운 기준을 적용해서도 안 되고 엄격해서도 안 된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것은 애들도 아는 상식이건만 롯데가 아닌 모 대기업 고위 임원은 "감동적이었다"고 표현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뇌물을 주고받았다는 '관심법 판결', 기업인은 으레 잘못했을 것이라는 '유죄 추정 판결' 논란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당연한 게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세월을 논할 때 과도한 친노조 정책을 빼놓으면 안 될 것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5일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를 방문해 몇 가지 얘기를 했는데, 이게 경제단체 관계자들 심금을 울렸다. "일자리 문제는 정부 혼자서 해결할 수 없고 경제단체와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 최근 노동 현안에 대해서도 현장의 문제점을 더 살피고 경영계 의견도 더 경청하겠다." 사실 이 정도는 역대 고용노동부 장관이라면 당연히 했어야 할 말이다. 그러나 노동계 편만 들었던 전임 장관 시절에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발언이었기에 주목을 받았다.

'당연하다'는 것은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한 것을 말한다. 당연한 것에 머물러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대개 순리대로 돌아간다. 반대로 당연함에서 벗어나면 온갖 부작용이 생겨난다. 무리수를 둬야 할 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시장(市場)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1년4개월이다. 그동안 한국 경제와 기업, 시장이 당연한 방식과 절차로 취급됐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의문을 표하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재계 사람들이 당연한 말 몇 마디에 감동을 먹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기대감도 있을 것이다. 이번 정부도 슬슬 당연함에 대한 각성이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안타깝게도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란 공포심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바닥을 긁고 있는 각종 경제지표가 그 방증이다. 기업과 기업인들은 '이번 정부는 이념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다. 대통령, 장관, 판결문의 몇 마디로는 허물어지지 않는 의심이다.

이런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업 투자는 바닥을 설설 길 것이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견·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부터 나가떨어지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시간을 허무하게 낭비했다는 비판에 겸손해져야 한다. 친(親)기업은 바라지도 않는다. 정부가 해야 할 당연한 일만 당연한 방식으로 해주면 된다. 우선 생각을 바꾸고 필요하다면 사람도 바꿔야 할 것이다.

[이진우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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