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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매경데스크] 힘든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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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12년 9월 11일 이슬람 무장단체가 리비아 벵가지에 위치한 미국 영사관을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인 크리스 스티븐스와 국무부 정보담당관 숀 스미스, CIA 요원 글렌 도허티와 타이론 우즈 등 4명이 목숨을 잃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국의 한 목사가 제작한 이슬람교의 무함마드를 비난하는 내용의 독립영화가 유튜브를 통해 급속히 퍼지면서 대규모 반미시위가 리비아에서 확산됐고, 유혈 피습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미국 외교관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사령탑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었다. 정치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은 힐러리가 수습책으로 내놓은 건 세 가지였다. 미숙한 초기 대응 논란이 나오자, 힐러리는 "미국 국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권리가 있고 그것을 알리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며 사건 다음날부터 수개월간 인터뷰와 기자회견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테러 근절)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며 국민을 안심시켰다. 또 신속하게 책임심의위원회를 열어 철저한 진상 규명을 독려하면서 전 세계 미국 외교공관의 안보 사각지대를 빈틈없이 조사해 고위험지역에 특수부대와 안보전문가를 급파했다. 벵가지 피습에 따른 대권 유불리를 따져 가며 뒤에 숨거나 책임을 전가하기보다 비난을 감수하며 직접 사태 해결에 힘을 쏟은 것이다.

6년 전 힐러리의 일화를 꺼낸 것은 문재인정부 들어 원전, 대입제도, 국민연금 등 중대 이슈를 처리하는 방식과 너무 비교돼서다.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을 보면 확고한 철학과 소신을 갖고 국민에게 설명하기보다는 의견 수렴을 이유로 공론화위원회나 합의기구로 넘겨 시간을 끌면서 여론의 장막 뒤에 숨는 데 급급한 듯한 인상이다. 실수하면 비난을 피하고 정책 결정의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려는 얄팍한 속셈이다.

지난 17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안도 그렇다. 1년간 교육부→국가교육회의→대입개편특별위원회→공론화위원회→시민참여단 등을 거쳐 여론을 수렴한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고작 내놓은 방안이 '정시 소폭 확대'이다. 정시 확대 요구를 수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교육과정에 맞춰 입시를 바꾼다는 근본적 목표를 달성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봉합안이다. 지난해 '신고리원전 5·6호기' 공사 재개를 둘러싼 공론화위 조사에서도 '원전 비중 축소' 의견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는 이유로 정부는 탈원전정책을 고수했다. 하지만 불과 1년 후 111년 만에 덮친 최악의 폭염으로 한국전력의 적자가 급증하고, 전기료 폭탄으로 이어지면서 급격한 민심 이반을 불러왔다. '용돈연금'이란 비아냥을 듣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놓고도 민주당은 사회적대타협기구를 구성해 결정하는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계층과 세대 간 견해가 엇갈려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이지만, 여당이 주도해서 개선안을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책임부터 회피하려는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민주국가에서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여론 수렴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문에 그쳐야지 전문성이 부족한 위원회 결정을 신줏단지 떠받들듯 해선 곤란하다. 국민이 정책 결정의 권한을 위임한 대상은 정부이지 위원회가 아니다. 이제는 대통령이 관료와 청와대 참모, 위원회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경제와 민생 이슈는 직접 챙겨야 한다.

국정 운영을 하다 보면 지도자에게는 힘든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역사는 대의와 국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채 지지 그룹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을 결정을 과감하게 내린 지도자들 덕분에 전진해왔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가 좌우명이었던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해 2차 세계대전을 종결지었고,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는 이슬람주의자들의 거센 저항을 뚫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정책을 펴 근대 민주국가의 초석을 놨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이라는 용단을 내렸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존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통해 혁신성장의 시동을 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 대통령이 한발 나아가 IMF 이후 최악의 고용참사 위기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소득주도성장 대신, 일자리를 늘리고 규제혁신·노동시장 개혁으로 경제의 근본 체질을 과감히 바꾸는 결단을 내린다면 국민들의 박수를 받게 될 것이다. 국민 앞에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 또한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다.

[박정철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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