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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좋은 계엄이란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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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발췌개헌과 5·16 쿠데타, 5·18 광주 학살…

계엄의 흑역사가 말해주는 계엄의 본질



계엄의 실체

착한 계엄은 없다. 계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총부리다. 1980년 5월 계엄 속 광주, 군 앞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학살의 주범 전두환은 “발포명령이 있기는 했나”라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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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대통령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있다. 그 사람은 국회의장도 아니고 대법원장도 아니며, 헌법재판소장도 아니다. 바로 계엄사령관이다.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서 국가 비상시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계엄사령관인데, 어째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행사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말이 되는가?

위기를 개발하는 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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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이란 ‘전시’나 ‘사변’ 같은 국가 비상사태 때, 군사상 필요나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이 선포한다. 계엄법에 따르면, ‘전시’란 적과의 교전 상태를 말하고, ‘사변’이란 국내의 소요 사태 등을 말한다. 즉, 계엄은 내·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선포되는 국가긴급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계엄이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촛불시위 같은 ‘소요 사태’가 기존 질서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판단할 경우,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계엄의 역사였다. 이승만 정부가 전남 여순(여수·순천) 지역에 계엄을 선포한 것은 정부 수립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종류와 지역을 달리하며 내내 계엄을 발동했다. 박정희를 필두로 하는 5·16 쿠데타,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 세력의 등장도 계엄과 함께 이루어졌다. 계엄은 군부 세력의 힘이 세지는 발판이 되었다. 여순사건부터 경찰을 압도한 군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군으로 성장했고, 결국 박정희부터 전두환에 이르는 군부독재가 수십 년간 이어졌다.

계엄은 국가가 매우 위급한 상황에 부닥쳐 있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할 때 발동할 수 있기 때문에, 계엄을 선포하려면 반드시 위기가 존재해야 한다. ‘위기’ ‘안정’ ‘헌정 질서’ ‘국가 보존’ 같은 낱말을 들으면, 우리는 혹시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다. 전시라고 반드시 계엄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무엇을 ‘근거’로 어떤 상황을 위기라고 판단하는가이다. 둘째는, 어떤 수준이 위기이고 어떤 수준이 위기가 아닌지는 대체 ‘누가’ 판단하는 것이냐다.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작성한 ‘대비계획 세부자료’(이하 ‘대비계획’)에는 ‘계엄선포 결심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위기를 판단하는 조건을 도표로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집회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가?” “사회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가”라고 물은 다음, ‘과격 폭력시위’ ‘폭동’이나 ‘경찰서 피습’이 벌어졌을 경우는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표시해놓고 있다. 과연 이것을 계엄 발동의 객관적 지표라고 볼 수 있을까? 경찰서 몇 군데가 피습되어야 위기라고 할 수 있을까? 과격한지 또는 과격하지 않은지를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10만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이면 위기인가? 아니면 100만 명이 모여 평화시위를 하면 혼란인가? 의문이 꼬리를 문다.

현재 상황이 위기라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1980년에 군부는 북한의 도발 정보를 흘리고 광주에 간첩이 침투해 배후에서 데모를 조종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만들어냈다. 위기는 주관적으로도 만들어진다. ‘대비계획’ 도표는 권력 찬탈의 ‘주관적 욕망’을 ‘객관적 외양’으로 꾸며,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는 자기 ‘망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계엄과 독재는 한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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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시작된 계엄은 원래 군사적 필요에 따라 생겨났다. 그 뒤 정치적 목적에 따른 계엄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한국의 경우, 계엄은 객관적 위기 상황에서 발동되기보다는 정권이 위기에 몰리거나 쿠데타의 방법으로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952년 발췌개헌 때 이루어진 계엄, 4·19와 5·16 그리고 10·26 사태 이후 내린 계엄 등은 군사적 필요라기보다 특정 세력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발동됐다.

계엄에서 잘 쓰이는 낱말이 ‘결심’ ‘결정’(decision)인데, 그 이유는 계엄이 객관적 지표가 아니라 자의적 수준에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결단은 안갯속 같은 혼란한 상황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지도자의 결정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의 정치적 의사표시와 삼권분립 등은 비효율적으로 간주되는 반면 일사불란한 독재는 효율적이고 질서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대중의 의사 표현을 무질서(혼란)하다고 느끼며, 질서(사실상 명령)를 따르는 국민만이 ‘참국민’이고 나머지는 ‘적’이라고 간주한다.

계엄선포권자 또는 계엄사령관의 결단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주권은 국민에게서 고독한 결단을 하는 사람에게로 옮겨진다. 나치 시기의 정치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에서 적을 분명히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지도자의 결단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히틀러의 독재정치를 정당화했는데, 계엄의 밑바탕에 흐르는 논리는 카를 슈미트 같은 극우적 이론에 기대고 있다. 계엄 발동부터 수행에 이르는 숱한 과정에서 결정하는 주체는 국민이 아닌 계엄선포권자 또는 계엄사령관일 뿐이다. 이들은 ‘결정하는 자’이기 때문에 ‘주권’ 자체가 되어버린다. 계엄에서 국민주권은 완전히 소멸되고, 민주주의는 허공 속으로 날아가버린다.

계엄 상태가 되면, 군은 행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한다. 치안과 집행권을 가진 행정기관은 계엄사령부의 지시와 명령을 받는 하부 기관으로 전락한다. 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한 <계엄실무편람>에는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각 부처에 전파하는 정부연락관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신을 체포·구속하고 판결하며 수감시키는 사법 기능도 계엄사령부의 권한이 된다. ‘대비계획’은 군사법원을 설치하는 계획을 포함하는데, 전국 각 지역에 설치하는 군사법원 수만 32개에 이른다. 비상계엄이 실시되면, 군사재판은 삼심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에 끝나기 때문에 즉각 처벌할 수 있다. 평상시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권력 통합이 국가 비상시라는 이유로 허용된다.

민주적 정치체제는 삼권분립이 기본 원칙이다. 입법·사법·행정의 각 부는 서로 견제하고 권력 쏠림을 방지하기 위해 독자성과 불가침성의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그런데 계엄 상태에서는 행정권과 사법권이 계엄사령관에 집중된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에 불과하며, 사법권을 침해할 수 없다. 그런데 계엄사령관은 행정·사법권 장악을 법률로 보장받기에 대통령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계엄사령관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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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실무편람>은 계엄사령관과 국무총리를 동격으로 표시했지만(91쪽), “행정사무에 관한 권한이 국무총리 권한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된다”(20쪽)고 밝힌다. <계엄실무편람>의 지휘체계에서 계엄사령관보다 높은 사람은 대통령 외에는 없다. 계엄사령관은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중앙정보부장보다 위에 있다. 계엄은 헌법이 규정하는 기존 질서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에서 헌법보다 위에 있다. 헌정 질서 수호를 천명한 계엄이 헌정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입법권은 국회의 고유 권한으로 보존되는가? 입법권도 예외는 아니다. 1980년 5월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한 뒤 무력으로 봉쇄했고, 헌정 중단 사태가 일어났다. 국회를 대신해 입법권을 가진 조직이 탄생한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정치활동규제법 등 총 215건의 법률을 넉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는데, 이는 계엄 상태에서는 입법권도 계엄사령부로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기무사가 작성한 ‘대비계획’은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시도하려 하면, 국회를 마비시키기 위해 국회의원을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계엄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헌법기관인 국회를 무너뜨려 계엄을 연장하려는 의도고,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계엄은 삼권을 장악하는 ‘합법적 쿠데타’를 가능하게 한다. 근대 민주주의 원칙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독재체제 수립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계엄사령관의 권력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권력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선출하지 않지만 무한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제 왕권에 가깝다. 민주정체에서 새로운 군주가 탄생하는 셈인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권한을 헌법과 계엄법이 보장한다는 사실이다. 전제 왕권과 비견되는 군부독재 체제 수립을 합법으로 포장한 것이 계엄이며, 계엄 상태는 무소불위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버린다. 이 새로운 경지가 열리면 기존 법률은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오래된 야만적 경구가 다시 살아나고, 계엄 포고에 따라 모든 질서가 새로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곧 법이 된다. 그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1980년 광주에서 드러났다.

한 언론은 7월 기무사의 계엄 문건들이 폭로됐을 때, 이 문건이 “계엄을 검토한 것인지, 아니면 쿠데타를 모의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언급했는데, 양자는 매우 가까운 관계이고 동시에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계엄이 기존 권력의 친위 쿠데타이건 권력을 뒤엎는 반역 쿠데타이건 간에, 계엄은 군사력으로 권력관계를 변화시킨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에서 이용문 세력은 계엄으로 쿠데타를 준비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9년 뒤 이용문을 존경했던 박정희는 계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전두환의 권력 장악도 계엄과 쿠데타가 동시에 진행됐다. 기무사의 계엄 준비는 그것이 기존 권력자를 받드는 ‘친위’ 성격이었다 하더라도 쿠데타임은 분명하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국가기관 장악뿐만 아니라, 저항 세력을 진압하는 게 필수다. 이런 이유로 계엄의 대상은 ‘국민’이 된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킨다는 군대의 존립 이유는 어느새 사라지고, 내부의 적을 척결하는 일이 군대의 임무로 변한다. 최초로 계엄이 선포됐던 여순사건, 그 뒤 한 달 뒤에 선포됐던 제주도 계엄으로 여순과 제주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몇만 명을 죽였다. 당시 군 지휘관들조차 계엄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지만, 계엄은 군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살인 면허장’으로 통했다. ‘국군’이라는 이름이 생기자마자, 대한민국 국군은 여순·제주에서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으로 역사를 시작했다. 합동참모본부의 <계엄실무편람>에는 계엄에서 과거 군 역할에 대해 어떤 반성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화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에 대한 전쟁은 그치질 않았다.

계엄의 숙명,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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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는 계엄이 결국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전쟁’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쿠데타는 5·16 쿠데타처럼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몇 단계를 거쳐 진행됐다.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1979년 12월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해 군부를 장악했다. 전두환은 다음해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했는데, 국가 주요 정보기관과 행정기관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남은 것은 신군부의 집권에 반대하는 국민뿐이었다.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국민의 시위와 저항이 높아지자 신군부는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계엄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을 억누르기 위해 유신체제의 아들 신군부가 내민 결전의 카드이자 선전포고였고, 10·26부터 시작된 ‘다단계 쿠데타’의 마지막 순서였다. 신군부의 권력 찬탈 과정의 마지막을 광주의 유혈로 마감한 전두환은, 8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기무사의 계엄 문건이 폭로되면서, 기무사의 위법한 행위가 비난받았다. 기무사가 자기 권한도 아닌 계엄을 준비했다는 것을 비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합동참모본부가 계엄을 기획하고 준비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국민 기본권 침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국민을 진압 대상으로 삼아 생명을 빼앗은 계엄의 역사를 미화한 합동참모본부의 계엄 운용 계획은 그 자체가 반민주적이며 반헌법적이다. 군은 과거에 국민을 탄압하고 죽이기조차 했던 여러 계엄에 대해, “교란된 질서를 회복하고”(4·19 당시의 계엄), “군의 개혁 의지가 분출하고”(5·16),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실시했던 것(10·26)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평가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계엄법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의적 운용을 방지할 수 있는 여러 견제 장치를 마련해 군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좋은 계엄’이 있을 수 있는가? ‘법대로 시행되는 계엄’은 환상에 불과한 것 아닐까? 계엄이 필요한 이유는 기존 법의 제한 때문에 하지 못했던 행동을, 특수한 상황에서 모두 할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이기 때문이다. 법조문대로 하지 않으려고, 계엄을 실시하는 것이다.

합법적 계엄은 환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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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계엄의 역사는 법조문에 따라 실행된 것이 아니다. 1948년 여순 지역에서와 같이, 계엄법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엄은 실시됐다. 법의 운용 과정에서 법은 해석됐다. 법은 조문이 아니라 그 운용에 핵심이 있는데, 계엄 운용은 전적으로 군에 맡겨져 있다. 계엄은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합법적 통로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국가를 구한 것이 아니라 정권을 보호했고, 수많은 국민을 적으로 돌리고 인권 발전을 억눌렀다.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던 계엄은 대한민국이 민주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법제로 아직도 남아 있다.

김득중 성균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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