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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유인경의 내맘대로 본다]항공사 회장이 받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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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아주 작은 땅콩과 물컵, 그리고 기내식이 한국을 대표하는 두 항공사의 위상을 땅으로 추락시켰다. 연이어 최고경영자와 간부들의 치졸한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한 번도 고위직이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라보지 않아서 나는 CEO의 책임감이나 기분을 잘 모른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들도 국회의원 배지만 달면 이상해지고 사장, 혹은 그룹 회장이 되면 ‘소통과 공감력’은 뇌의 한 부분에서 제거되는 것이 우리나라 관습법인 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대한항공 일가의 도덕 불감증과 (스스로 고백했듯) 분노조절장애도 놀랍지만, 아시아나항공 박삼구 회장의 지나친 직원 사랑(?)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최근 박삼구 회장 퇴진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은 익명이긴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전했다.

“박회장이 교육을 받고 있는 승무원들을 한 달에 한 번씩 방문을 하는데, 그 때에 맞춰 노래와 퍼포먼스를 준비해야 했다. 교육생 신분의 입사 1년차 승무원들이 ‘회장님을 뵙는 날. 자꾸만 떨리는 마음에 밤잠을 설쳤었죠. 새빨간 장미만큼 회장님 사랑해. 가슴이 터질 듯한 이 마음 아는지’ 등의 개사곡을 부르며 박 회장을 찬양하는 이벤트에 참여하도록 강요받았다.”

“박 회장이 교육장에 들어서는 순간 미리 정해진 역할대로 안기거나 팔짱을 끼고 ‘회장님 보고 싶어서 밤잠을 설쳤습니다’ ‘회장님 사랑합니다’ 등의 멘트를 해야했다. 박 회장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그를 밀착해 둘러싼 상태로 경청하고, 박 회장이 떠나려고 하면 사진을 찍어 달라거나, 더 있어 달라고 계속 조르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회장님 한 번만 안아주십시오’라는 말은 삼가라는 교관의 지시까지 있었다. ‘한 번만’이라는 말이 박 회장의 기분을 거스를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공식행사가 아니라 사적으로 회장과 여승무원들이 문자를 주고 받았다. 그 빈도와 내용에 따라 확실히 승진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박 회장이 오면 젊은 여승무원만 좋아해 나이든 여직원들은 심지어 화장실에 숨어 있기도 했다.”

박 회장은 이런 상황에 ‘승객 서비스를 위해 연구해야지 나한테 왜 이러나’란 말은 커녕 ‘너희들 덕분에 기 받고 간다’라며 흐뭇해했단다. 여직원들을 껴안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 기운을 차리는 분이라면 진즉 다른 업종으로 전환을 해야하지 않았을까.

더욱 분노 지수가 높아지는 것은 출산휴가를 다녀온 여직원들에게 다시 복직시켜 줘서 감사하다는 손편지를 쓰게 한 것이다. 출산휴가는 국민의 기본권리이고 이 법이 만들어지는 데 박 회장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이 편지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진심으로 궁금하다. 진짜 CEO가 받아야 할 직원 편지의 모범 사례는 사우스웨스트항공사 허브 켈러허 회장이 공개적으로 받은 편지다.

1994년 사우스웨스트항공 직원 1만6000명은 일간지 <USA투데이>에 “감사합니다 허브, 우리 직원들 이름을 모두 기억해 주신 것에…. 우리의 휴일 파티에서 노래 불러 주신 것에…. 회장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 주신 것에”라는 편지 형식의 광고를 냈다. 정년퇴임 때도 아니지만 평소 회장에게 감사한 마음에 6만 달러의 광고비를 기꺼이 함께 지불했다.

상습적으로 불평불만의 편지를 보내는 진상 승객때문에 걱정하는 직원에게 켈러허 회장은 회사를 대표해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신이 그리울 거에요. 안녕!” 그만큼 직원들을 믿어 주고 직원들의 사기를 신경썼다. 이 항공사는 동종업계보다 근무 여건이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직률은 6.4%로 낮다. 9·11테러가 났던 2001년,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에도 흑자를 냈다.

“회장님을 뵙는 날. 자꾸만 떨리는 마음에 밤잠을 설쳤었죠. 새빨간 장미만큼 회장님 사랑해. 가슴이 터질 듯한 이 마음 아는지.”

직원들이 개사해 부른 이 노래의 진짜 속마음은 ‘회장 보기 전 날 너무 짜증나고 답답한 마음에 밤잠을 설쳤죠. 회장 사랑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아는지. 이런 역겨운 일을 억지로 시키는 교관들과 좋아죽는 회장 때문에 가슴이 터지는 걸 아는지’가 아닐까.

직원은 가슴 아프게 하고, 승객은 배고프게 하면서 항공료는 왜 그렇게 비싸게 받는 걸까.

<유인경 작가·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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