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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시론] 정치에 휘둘리는 ‘국민연금 관치주의’ 문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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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권 행사 스튜어드십 코드

금융위기 뒤 외국서 속속 도입

한국선 지배구조 개편에 이용

민간 기업의 경영에 간섭 우려

중앙일보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1년째 공석 중인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인선 과정에서 청와대 개입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는 가운데 보건복지부는 7월 말 또는 8월 초에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을 심의할 것이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기관투자가가 주인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투자 기업을 상대로 주주권을 충실히 행사토록 하는 지침이다.

기관투자가가 위탁받은 자산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 여부를 떠나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다.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 7개 원칙은 기관투자자가 수탁자로서 고객 관점에서 의결권 행사의 절차와 기준을 마련해 공개하고 의결권 행사 내용과 이유를 적절한 방식으로 알리는 것 등을 규정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해외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기 이전인 2005년부터 의결권 행사를 위한 지침 제정과 전문위원회 등을 구축해 의결권 행사를 강화해 왔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두고 재계가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금융회사 경영진의 잘못된 위기관리를 견제하는 영국 등 외국과 달리, 한국에서 진행되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에 이용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융위원회는 공적 연기금이 구체적인 주주권 행사 지침을 공시하고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주식 보유 목적과 관계없이 약식 보고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한 그동안 국민연금이 특정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갖고 있어도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공시해왔다. 하지만 향후 ‘경영 참여’라고 적시할 경우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의 의미와 내용은 질적으로 달라진다. 주주권 행사가 경영진 해임안 상정, 임시 주주총회 소집, 나아가 기업 경영권의 향방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국민연금 기금이 여타 중소 규모의 기관투자가와는 그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4월 말 현재 635조원의 기금 중 135조원(21%)을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기업 수는 275개, 10% 이상은 84개나 된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 KB금융 등 산업별로 간판급인 기업들의 지분도 10%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갖고 있다. 대기업 지배구조가 매우 취약한 상황임을 고려하면 국민연금 기금이 마음만 먹으면 각 기업의 최대 주주로 등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금 사회주의’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 퇴직연금 자산을 매개로 기업 경영이 노동조합에 지배되는 상황을 의미하지만, 국민연금에서는 ‘연금 관치주의’가 우려된다.

중앙일보

시론 7/10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이고 관련 4개 부처 차관, 공단 이사장, 사용자(3명), 근로자(3명), 지역가입자 대표(6명)와 전문가(2명)로 구성돼 있다. 외형상으로는 가입자 대표가 위원회에서 다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부 주도로 운영되는 것이 현실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관치를 앞세운 정권이나 정치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현형 체계 아래에서도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판에 스튜어드십 코드까지 도입하면 정권이 국민연금 기금 운용에 더 개입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기업은 기업가 스스로 책임지고 신명 나게 할 수 있어야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주주권이 과도하게 행사되면 기업 경영 활동은 위축되고, 식어가는 기업의 투자 의욕이 꺾이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혁신성장도 공염불이 될 수 있다.

국민연금 기금은 2022년 1000조원을 돌파해 2043년에는 2561조원 규모가 될 전망이다. 규모의 거대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 논의는 신중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연금 기금 지배구조가 전문성을 기초로 투명성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도록 개편돼야 한다. 국민연금 기금에 의한 주주권 행사가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과 경영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법 제정도 검토해야 한다.

혹자는 국민연금 기금으로 대기업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공정거래·금융감독·세무조사에다 경찰과 검찰 등 기업에 대한 현행 공권력 행사 수단만 해도 지나칠 정도다.

정부는 적립기금 고갈 위험에 대비해 국민 부담을 가중할 연금보험료 인상을 포함한 재정 안정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금 운용만 잘해도 고갈 시점을 대폭 늦출 수 있는 국민연금 기금을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고유 목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오염시키는 우(愚)는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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