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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광화문에서/신광영]청탁자, 전달자, 실행자… 채용비리, 참 어려운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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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강원랜드 채용비리의 최고위급 청탁자라는 혐의를 받아온 3선 중진의원은 국민의 시선이 쏠린 포토라인에서 자기 지역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유한국당 권성동 의원은 4일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서울중앙지법에 나와 “우리 강릉시민들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고 했다. “검찰의 무리한 법리 구성에 대해 (판사에게) 잘 소명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지적대로 ‘법리 구성’은 채용비리 수사의 아킬레스건이다. 응당 입사해 월급 받아야 할 사람을 무직자로 만들고 그 자리에 무자격자를 꽂는 일. 이 누가 봐도 나쁜 짓을 응징하기 어려운 게 채용비리의 고약함이다.

채용비리는 외부의 ‘청탁자’, 내부의 고위 ‘전달자’, 인사부서 ‘실행자’ 등 3자 공동 범행이다. 이들의 언어는 선의로 위장한다. 특정인을 거명하며 “인재를 놓치지 않게 세심히 살펴 달라”거나 “열심히 했으니 필기는 보게 하자”며 인간애를 자극한다.

지령이 실행자에게 전달될 땐 ‘전략적 모호함’이 절정에 달한다. 포스트잇에 이름 세 글자만 적어 건네거나, 조선시대 임금이 관료를 뽑을 때 ‘낙점(落點)’하듯 지원자 명단 옆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다. 합격자 발표를 한참 앞두고 “아무개 붙었느냐”고 묻는 수법도 있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사람 잘 챙기는’ 청탁자와 ‘융통성 있는’ 전달자는 빠지고, ‘말귀 잘못 알아들은’ 실행자가 독박을 쓴다. 3자 간 연결고리는 흐릿하고 꼬리가 밟혀도 자를 수 있게 설계된, 완성도 높은 범죄다.

‘전화 한 통’에 관대한 문화 탓에 그나마 범죄로 여긴 것도 2000년대 중반 이후다. 오래된 ‘신종 범죄’다. 검찰이 재판에 넘기는 사건은 1년에 3, 4건 정도로 드물다.
가해자를 겨우 찾아 법정에 세우면 이젠 피해자가 모호해진다. 현행법상 채용비리는 ‘회사의 채용 업무를 방해한 죄(업무 방해)’다. 법은 억울하게 떨어진 지원자 대신 사측을 피해자로 본다. 채용 책임자가 비리 직원한테 속았다는 게 입증돼야 비로소 업무를 방해받은 것으로 인정된다.

문제는 채용을 관장하는 회사 수뇌부가 대개 청탁의 전달자 또는 방조자라는 것이다. 한통속인 고위 간부가 실행자에게 속았다는 절묘한 사실관계가 구축돼야 처벌이 가능하다. 그래서 법정에선 꼬리를 자르는 임원과 ‘물귀신’ 인사팀장이 종종 격돌한다. “서류 위조까지 할 줄 몰랐다”는 임원 앞에서 팀장은 “혼자 못 죽는다”며 임원과의 통화 녹취를 내민다.

실행자까지 구제하려는 기업은 “업무를 방해받은 적이 없다”는 대담한 전략을 편다. 합의하에 더 필요한 인재를 뽑았을 뿐이라는 식이다. 전형 도중 채용기준을 바꾸고 서류를 꾸며 지원자 순위를 뒤바꾼 일을 경영적 결단으로 둔갑시킨다.

채용비리로 요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정관계 인사나 수백억 원을 맡긴 VIP 고객의 자녀를 뽑아야 은행에 이익인데 왜 채용의 자유를 막느냐”고 푸념한다. 업무 방해는커녕 ‘업무 촉진’이라는 것이다.

법률상 피해자가 “피해가 없다”고 항변하는 난센스가 벌어지는 사이 실질적 피해자들은 가슴이 미어진다. 합격증을 ‘절도’당하고 입사전형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사기’당하면서도 자신이 피해자인지 알 수 없어 가슴 미어질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이다. 그래서 엄연한 권력형 범죄의 피해자지만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 나서지 못한다.

‘비리 기업’ 직원도 피해자다. ‘뒷구멍 신입’은 그 자체로 리스크일뿐더러 동료에게 무력감과 불신을 심는다. 비리 가담자들은 내밀한 이익을 위해 조직의 잠재력을 ‘횡령’한 것과 다름없다. 기회 균등이라는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사회적 범죄이기도 하다.

“무리한 법리 구성”이라던 권 의원의 소신이 통했는지 법원은 5일 ‘법리상 의문점이 있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권 의원은 “설령 추천을 했다고 해도 청탁자를 처벌한 사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검사 출신답게 채용비리 기소에 애먹는 후배 검사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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