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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허영섭 칼럼] 트럼프의 체스 실력 믿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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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대에서의 외교전은 종종 체스판에 비유된다. 동양식 표현으로는 장기나 바둑이 될 것이다. 미국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중국 외교정책을 바둑에 비유한 것은 자못 흥미롭다. “체스는 상대방의 킹(King)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지만 바둑은 우위 선점과 장기적인 전략에 더 중점을 둔다”고까지 꿰뚫고 있다. 바둑이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에 체스보다 어렵지만 몇 수 앞을 더 내다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다.

요즘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지는 외교전이 바로 바둑판의 모습이다. 분계선을 맞댄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이 서로 이해관계에 따라 승부를 거드는 형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으로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간 단계지만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관련국들의 눈치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어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방문을 위해 러시아로 출국했다.

이러한 외교전이 북핵 문제에서 시작됐지만 종착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장차 남북한 통일 문제와 이를 둘러싼 동북아 질서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진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 구축 방안을 거론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 65년 동안 지속된 한·미동맹이 원점으로 돌려지고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까지 내다본 구상일 것이다.

이미 한·미 연합훈련 중단 방침이 발표됐고, 더 나아가 주한미군 감축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기가 멀다고만 간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존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군사적으로 대치하던 남북한이 협력관계로 가까워지고 무력충돌 가능성이 해소된다면 굳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할 필요까지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금강산에서는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게 되며 군사회담도 등급을 높여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우라고 해도 끝까지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현실적인 문제다. 협상이란 주고받는 것인데, 어느 한쪽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도중에라도 깨지기 십상이다. 결국 기본전략과 함께 회담에 임하는 지도자들의 각오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혹시 잃더라도 덜 잃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진행되는 북핵관련 협상을 지켜보며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바둑에 비유하든, 체스에 비유하든 수준 이하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당초 주한미군 문제는 북·미정상회담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으나 지금 진행되는 모습은 전혀 딴판인 데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미국 정가와 언론에서도 “주한미군을 장기판의 말처럼 취급해선 안 되며 한·미훈련 최소는 잘못”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비단 한반도 문제에서만이 아니다. 밀입국 부모와 자녀를 분리 수용했는가 하면 유엔 인권이사회 탈퇴를 결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과거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유네스코에서 탈퇴했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물론 기존 우방국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역전쟁도 비슷하다. 재벌을 일으킨 입장에서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했지 세계질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

상대적으로 이익을 본 것은 북한이다. 김 위원장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됐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도약의 기회를 마련하게 됐다. 문 대통령과 시 주석도 나름대로의 전략은 뚜렷하다. 두 지도자가 바둑의 기본 실력을 갖췄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적어도 트럼프보다는 자기 원칙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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