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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오늘과 내일/이철희]‘싹싹한’ 젊은 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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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철희 논설위원


어르신 세계에서 30대 청년이란 대개 ‘시건방진 것들’쯤 아닐까 싶다. 어쩌다가 싹싹하고 곰살궂은 청년이라도 볼라치면 ‘저런 기특한 녀석도 있네’ 하며 쉽게 반색하기 마련이다. 서른넷의 김정은을 만나본 72세 어르신 도널드 트럼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특별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며 폭풍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는 재능이 많다. 26세에 국가를 맡아 터프하게 운영한다. 그 나이에 그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만 명 가운데 한 명이나 될까.” 김정은의 재능을 ‘터프한 국가 운영’에서 찾는 대목에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권위주의 통치자도 수없이 칭송했던 트럼프이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65세 시진핑과 문재인도 ‘기특한 젊은이’를 만난 어르신처럼 보인다. 세 번씩이나 중국을 찾아온 깍듯한 청년을 바라보는 시진핑의 표정은 더없이 흡족해 보였다. 문재인도 이렇게 칭찬했다. “아주 젊은 나이인데도 상당히 솔직담백하고 침착한 면모를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연장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주 예의바른 모습도 보여줬다.”

이쯤 되면 김정은은 적어도 한미중 정상 사이에선 ‘말이 통하는 젊은이’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나이 지긋한 원로들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최측근마저 굽신굽신 입을 가리고 보고하게 만든 북한의 절대 권력자로부터 어느 결엔가 예의바른 지도자로 180도 변신했으니, 김정은의 데뷔는 일단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의 새파란 나이는 부지런함과 예의바름이 덧붙여지면서 오히려 장점이 됐다. 김정은은 지난 석 달 새 정상회담을 여섯 차례나 했다. 가까이는 판문점, 멀리는 싱가포르까지 다녀왔다. 이곳저곳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게릴라 외교’도, 어려운 처지에 두루 환심을 사기 위해 ‘저팔계 외교’도 해야 하는 생계형 외교 행태라고만 보아 넘기기는 어렵다.

최고 권력자의 셋째 아들, 그것도 ‘째포’(북송 재일교포)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김정은이 후계자가 된 것은 무엇보다 형들에게 결격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와 권력층의 눈에 들기 위한 그 자신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최소한 ‘싹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사람을 어르고 구슬리는 특별한 재주도 키웠으리라.

김정은은 어르신들에게서 직접 예절 학습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이심전심으로 김정은을 지도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도 있다. 트럼프는 5월 초 국무장관을 평양으로 보내 북-미 회담 장소를 싱가포르로 확정지은 직후 “시 주석이 이틀 전 매우 구체적인 뭔가로 큰 도움을 줬다”고 시진핑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 도움이란 바로 전용기 대여였을 것이다.

당초 김정은은 안전을 이유로 장거리 외출을 한사코 거부했을 테지만 트럼프의 요청으로 시진핑이 전용기를 내주면서 일단 체면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문재인의 개인과외도 한몫했다. 한번 튕겨 보자며 북-미 회담 ‘재고려’를 꺼냈다가 전격 ‘취소’라는 강수에 놀란 김정은이 황급히 판문점에서 한 수 지도를 청한 어르신이 문재인이었다.

이런 김정은의 염치 불구 행보는 ‘아직 젊으니까’라는 이유로 양해도 받고 칭찬도 받는다. 하지만 아직은 테스트 기간일 뿐이다. 마냥 격려나 칭찬을 받을 순 없다. ‘싹수없는 어린 녀석’으로 전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제각기 요구도 다르고 시샘도 많은 어르신들이다. 모두에게 다 잘해줄 수도 없다. 특히 트럼프의 변덕이란. 김정은의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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