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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직역 vs 가독성…칸트 번역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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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백종현 전 교수


최근 칸트학회 소속 철학자 34명이 모여 '칸트 전집(全集·한길사 펴냄)' 한국어판을 내놓으면서 번역어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칸트학회는 내년까지 모두 16권으로 칸트 철학 번역서를 내놓을 계획이며, 최근 3권을 1차로 발간했다. 이번 전집에는 그동안 번역이 나오지 않은 비판기 이전 저작,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 도덕형이상학 등이 포함됐다. 이번 번역에 참여한 최소인 영남대 교수는 "많은 사람이 번역하고, 번역문을 돌려보면서 책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며 "인문학은 본래 개인 중심으로 연구하지만 칸트 전집을 출간하면서 집단지성을 활용했다"고 밝혔다.

칸트학회는 이번 전집을 발간하며 가독성을 높였다고 자평하고 이번 번역을 정본(定本)이라고 소개했다.

문제는 칸트 전집을 발간하면서 곧바로 불거졌다. 한국 칸트학계 대부로 불리며 2002년부터 칸트 전집(아카넷 펴냄)을 혼자 번역해 내놓고 있는 백종현 전 서울대 교수가 칸트학회 전집을 비판하고 나선 것. 백 전 교수는 최근 매일경제와 서면으로 인터뷰하면서 "어떤 저자의 저술이 여러 판본으로 유통되고 있을 때 충분한 고증을 거쳐 그중 하나를 선정하거나 또는 비판적으로 새로운 판본을 생산해 '이것이 결정적인 판본'이라고 정하는 것을 '정본(定本)'이라 한다"면서 "번역은 일종의 복제품인데, 복제품에 '정본'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동안 한국 칸트 번역은 백 전 교수가 펴낸 칸트 전집에 상당 부분 의존해 왔다. 그가 내놓은 번역서만 10종 11권에 이른다. 칸트 철학 번역어 또한 백 전 교수가 채택한 용어를 점차 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백 교수의 칸트 번역은 직역에 의존해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번역서는 복제품인 만큼 한국어를 독일어로 다시 번역할 수 있을 만큼 원문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 아래 번역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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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학회가 최근 발간한 칸트전집. [사진 제공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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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전 교수는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인 '아프리오리(a priori)' 번역에도 날을 세웠다. 아프리오리는 그동안 선험적(先驗的)·선천적(先天的)으로 번역했다. 백 전 교수가 내놓은 전집에는 선험적이라고 번역했고 학계가 대부분 따르는 추세였다. 하지만 칸트학회는 수차례 논의 끝에 적확한 번역어를 정하지 못했다며 발음 그대로 '아프리오리'로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칸트 철학의 핵심 용어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백 전 교수는 "문자대로 옮기자면 한국어 '선차적(先次的)'이 가장 근접하고 역사적 맥락으로도 가장 무난하다"면서 "'선차적'에는 '~보다'가 함유되어 있는데 칸트 철학에서는 '경험보다 선차적'이니 '선험적'으로 하는 편이 더 좋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궁여지책이라면 차라리 '선차적'이 훨씬 더 좋은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도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 연애, 사회 등과 같은 용어를 번역했다"면서 "중요한 개념을 가리키는 말을 번역해 낸 것인데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아프리오리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말을 찾는 노력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불거지고 있는 배경에는 칸트 철학의 번역이 한 나라의 지성 수준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기때문이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철학은 흔히 호수로 비유한다. 칸트 이전 모든 철학은 칸트로 흘러갔고 칸트에서 흘러 나왔다는 뜻이다. 칸트가 채택한 철학 용어는 후대 학자들이 그대로 차용해 쓰기 때문이다. 칸트 번역이 흔들리면 철학 번역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할 정도다.

[김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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