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 이목은 ‘허실생백부(虛室生白賦)’를 ‘다부’에 붙였는데 그보다 한 세대 앞선 선비들 중에도 도가의 ‘허백(虛白)’ 사상에 대한 추종자가 많았던 것 같다.
홍귀달(洪貴達·1438∼1504)과 성현(成俔·1439∼1504)은 둘 다 호를 ‘허백당(虛白堂)’이라고 붙였다. ‘허백’은 당시 풍류의 새로운 유행이었던 것 같다. 홍귀달은 과거에 급제한 뒤 동부승지를 지내고 좌참찬에 이르렀으나 연산군의 손녀를 궁에 들이라는 명을 어겨 유배 중에 교살되었다. 그는 ‘허백당 문집’을 남겼는데 몇 편의 차시가 있다.
“동각의 고매한 선비는 필 휘두르고 싶은데/ 서호의 처사는 시상에 젖어있네./ 서로 말없이 한참 앉아 있다가/ 동시에 노동의 한 잔 차 부른다네.”(‘梅?素月’)
“베갯머리는 찬데/ 차 따르니 맑은 달이 차병에 흘러드네./ 녹음 짙은 정원에서 시를 읊으니/ 외로운 등불 벽에서 졸고 있네.”
성현은 대사간·대사성을 두 번이나 지냈고, 국악의 보물 ‘악학궤범(樂學軌範)’과 ‘용재총화(?齋叢話)’를 남겼다. ‘악학궤범’은 조선 성종 때에 편찬한 악서(樂書)로 성현과 유자광·신말평이 성종의 명에 따라 편찬한 음악 이론서이다. 용재는 성현의 또 다른 호로 ‘용재총화’는 유명한 수필집이다. 풍속·지리·역사·문물·제도·음악·문학·인물·설화 등이 아름다운 문체로 수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성현의 차시는 그의 학문과 문학과 교양으로 인해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다는 평이다. 그의 차시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의 일상화된 음다 풍습을 읽을 수 있다.
“열린 선방에는 심기가 차분하고/ 나그네의 찻사발은 색과 맛이 수척하네./ 나옹화상의 선적(禪跡)을 읽고 있는데/ 한산 비석의 글자들이 반쯤 희미하네.”(‘題報恩寺’)
“소나무 우거진 연봉들이 둘러있는데/ 옆 집 스님을 불렀다네./ 차솥 앞에 놓고 종일 얘기하니/ 장차 이 몸 청간(淸間) 속에 맡기려네.”(‘三陟竹西樓八詠’)
차를 마시면서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차인들은 음다 행위를 통해 철학을 체화(體化)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말로써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철학을 하는 것이 차의 철학이고, 차의 정신이다.
차를 마시는 일이 마치 숭늉 먹는 일처럼 되고, 차를 마시는 일이 마치 여가에 독서를 하거나 음악을 듣는 일처럼 일상화되어야 한다. 차를 마시는 일이 무슨 특별한 일이 되면 그것은 거짓 차인이다.
차를 마시는 일을 가지고 무슨 벼슬이라도 하는 양 으스대고, 차를 제대로 마시기도 전에 차인이라고 소문내면서 정착 차를 마시는 일이 적으면 거짓 차인들이다.
차는 차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완성해야 한다. 차를 기르고, 따고, 만들고, 우리고, 마시기까지 실천의 미학이 배경처럼 깔려있어야 한다. 일부러 차 공간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이 우러나올 때 차의 미학이 완성된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든 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일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에 이르러 송나라의 주자학은 조선에 토착화되고, 조선의 소리를 담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도통(道通)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당나라 때 중국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선종(禪宗)을 만들어낸다. 이어 송나라 때 신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자학(朱子學)을 만들어낸다. 노장과 불교를 분모로 하여 원시유교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것이 주자학이다.
영남사림의 도통은 조선 후기에 형성되지만 15∼16세기에 그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정몽주→길재→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이언적→퇴계 이황 등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 맥락에 퇴계가 있음으로써 빛이 더 나는 것은 사실이다.
원시유교에 이(理)와 기(氣)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철학적으로 심화한 주자학은 조선 중기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주자학의 토착화이다. 송학의 토착화는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주리학파와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주기학파, 그리고 그 중간에서 이기의 상호작용에 비중을 두는 학파로 가닥을 잡는다. 그 주리학파의 영수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고, 주기학파의 영수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고, 그 중간이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이다.
일본다도의 형성에 젠(Zen)의 영향을 떼려야 뗄 수 없듯이 한국 풍류차·청담차·선비차의 성립에도 조선 도학(道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도학은 이학(理學)·성리학(性理學)을 말한다. 조선 도학의 주류는 기(氣)보다는 이(理)에 치중하게 된다.
‘이학’은 ‘기학’보다는 차에 관심이 적게 마련이다. 차는 물질이기 때문에 성리를 추구하는 도학자보다는 사장(詞章)에 관심이 많은 쪽에서 즐기게 마련이다. 차도는 차라는 음료를 가지고 무심의 경지에 이르는 도이다.
한국의 차 생산지는 주로 따뜻한 남쪽으로, 요즘으로 보면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일대이다. 이들 지역은 또한 도학보다는 시문에 뛰어난 인물이 배출된 지역이다. 영남의 도학과 호남의 사장과 차가 만나서 물심양면에서 차도가 성립한 것은 영남 출신의 선비들(주로 남인들)이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훈구학파와의 당쟁에서 유배를 가거나 아니면 고향으로 낙향하고부터이다. 유배지는 주로 호남의 도서나 영남의 벽촌이었다. 그래서 영남의 남인들과 호남의 남인들은 하나의 사림을 이루면서 혼반(婚班)을 이루었다.
영호남 사림의 남인들은 충청도 훈구학파의 노론과 대척점에 있었다. 해남의 윤선도(尹善道)나 강진의 다산(茶山)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등장은 이러한 지리적·역사적 배경의 산물이다. 호남이 기호학파의 세력에 편입되는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이 한때 공부를 하고 차를 마시고 자연을 즐겼던 안동의 청량산(淸凉山). ‘차의 세계’ 제공 |
퇴계는 손님이 오면 술을 내오기도 하고, 차를 내오기도 했다. 특히 손님이 제사가 있는 것을 알면 차를 내오게 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다경(茶經)’과 ‘다록(茶錄)’을 읽고, 주자가례를 통해 다도구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의 차시를 보면 ‘필상(筆牀)’과 ‘다조(茶?)’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대나무로 지은 죽원(竹院)에서 계수나무를 주워 차를 끓이기도 했다.
퇴계를 흔히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한다. 청량산 암자에서 공부도 하고, ‘도산육곡(陶山六曲)’을 짓기도 했다.
“내 월란암에 머물 때/ 그윽한 마음 자못 잡지 못했네./ 낡은 집은 허물어져 비 새고/ 노승은 선(禪)에 들어 고요했네./ 버드나무 아래 작은 우물에서 물을 길으면/ 청개구리들이 와글거리며 뛰어다니네./ 내 조물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 이 아름다운 경치를 열 때에/ 맑은 개울과 푸른 산봉우리를 두어/ 나그네를 흡족하게 했는데/ 유독 차 샘은 두지 않았는지?/ 어이 잔과 그릇을 깨끗이 하리오.”
“맑은 물 한 줄기 몇 천년 흘렀는가./ 지금 시인은 낚싯배 위에 앉았네./ 물결 따라 출렁거리며 물안개 너머 갔다가/ 돌아올 때는 달을 향해 떠있네./ 평상과 다조로 오리와 얘기하고/ 부슬비 내리고 바람 부니 갈매기도 날지 않네./ 차고 비는 것이 한정이 있음을 알기에/ 시골로 가는 길에도 마음 쓰이지 않네.”(‘선창범주(仙倉泛舟)’)
“숲 사이 높은 집 흡사 작은 배 같은데/ 만년에 평대에 올라 푸른 계류 바라보네./ 나뭇잎 떨어질 때 소나무 굳은 절개 알고/ 서리 내릴 제 국화 향 짙음을 깨닫네./ 산 동자는 차 끓일 줄 알고/ 여악(女樂)은 뱃머리에서 수조가를 부르네./ 스스로 세속을 끊지 못함이 부끄럽네./ 상암의 선경에 노님에 얻음이 크네.”
청량산에는 오늘도 안동과 봉화 일대의 차인들이 많이 찾는다. 찻잔 너머로 청량산이 보인다. ‘차의 세계’ 제공 |
위의 시는 퇴계가 같은 안동에서 가까이 살고 있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쓴 시이다. 농암은 퇴계보다 빨리 벼슬한 이 고장 선비로 퇴계에게 청백리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농암ㄴ 주로 외직을 자청하여 아홉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강호(江湖)에서 풍류(風流)를 즐기며, 시가에 몰두하여 ‘농암가(聾巖歌)’와 ‘농암 어부가(漁父歌)’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영남가사도 개척했다.
화담 서경덕은 퇴계보다 12년 먼저 세상에 나온 인물로 한국에서 기(氣)철학을 독자적으로 개척하였지만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의 선비로 생을 마쳤다. 그는 중국의 기철학자 장재(張載·1020∼ 1077)에 못지않은 독자적인 ‘기’의 세계관을 연 인물이다. 그의 ‘귀신사생론’은 귀신과 신의 변용에 대한 논변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깨달음의 경지와 차도에 이른 인물은 흔치 않다.
“내 운암에 살기로 한 것은/ 다만 성품이 못나고 엉성하기 때문이네./ 숲 속에 앉아 새들과 벗하고/ 개울가를 거닐며 고기들과 함께 즐긴다네./ 한가할 땐 꽃 언덕 길 쓸고/ 때론 호미 들고 약초밭 매러 간다네./ 이 밖엔 할 일 없어 차 마시고 옛 책 본다네.”(‘산거(山居)’)
조선 중기에 벌어진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는 아까운 인재들을 많이 앗아갔다. 이런 당쟁과 시련 속에서도 한국 성리학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 퇴계의 스승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율곡 이이한테 영향을 끼친 화담 서경덕이다.
송도 사람들은 가부를 가릴 다툼이 생기면 서경덕을 찾았다고 한다. 그와 기생 황진이와의 이야기도 그의 인품을 높이 산 황진이가 자청하여 수발을 들었던 데서 유래된다. 화담의 제자로는 영의정을 지낸 허엽이나 박순, 토정 이지함과 같은 걸출한 선비들이 많다.
조선조 성리학의 최대 성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대표하는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학설이다. 이는 중국 정주학(程朱學)에도 없는 한국 철학의 독자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율곡은 당시에 이미 존재보다는 소통이 중요함을 깨달은 철학자이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해 이기일원론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율곡의 천재성을 퇴계도 높이 사고, 그의 건강을 염려했을 정도이다. 율곡은 퇴계의 염려대로 단명한 편에 속한다.
“약 캐다가 홀연히 길을 잊고서/ 돌아보니 온 산이 단풍잎이네./ 산승이 물 길어 가더니/ 숲 끝에서 차 연기 이는구나.”(‘산중(山中)’)
“선생은 용퇴하여 토구 오막살이에 누웠네./ 한가로이 즐기면서 사는 것이 좋음을 알았구려./ 차 솥에 불 사그라지니 솔바람소리 고요하니/ 대 수레 타고 귤나무 숲 안으로 사라지네.”(‘기정석천(寄呈石川)’)
“구름 끼어 비 내리니 숲속은 어둑하네./ 산속 집은 반대로 푸르기만 하네./ 차 마시고 나니 할 일이 없어/ 시(詩)와 선(禪)에 대해 잡담하네.”(‘중유풍악(重遊楓嶽)’)
화담·퇴계·율곡 등 거유(巨儒)들의 등장은 한국 차도나 차학의 성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지만 성리학을 기조로 한 도학의 완성과 문화의 깊이를 더 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이러한 철학적 성과가 사회적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능을 할 무렵, 뜻하지 않게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기호학파를 이끌어온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면서 위기에 대처하려고 하였지만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함으로써 일본 전국(戰國)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욕망의 제물이 된다. 전화(戰禍) 속에서 차(茶)는 한참 동안 길을 잃고 만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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