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四季
1.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나의 ‘눈이 밝지 않음’을 먼저 고백하는 게 순리 같다. 그러니까 지난해 5월 어느 날, 주간지 ‘타임’은 표지 인물로 약간 어두운 톤의 문재인 대통령 사진을 게재하고 ‘협상가(Negotiator)’라고 표현했다. 나는 원문도 읽지 않았고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대선과 거리를 뒀던 터라 그 취지와 맥락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생뚱 맞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연재의 첫 인물로 문 대통령을 다루려고 보니 이미 1년 전 그를 ‘협상가’로 바라봤던 ‘타임’의 혜안과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나의 우둔이 대비됐다. 문 대통령은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시키며 일거에 북한과 미국의 정책변화를 유도하는 데 성공하는 한편 동북아 외교의 중심에 자리한 ‘대협상가’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타임’이 세계사 또는 동북아 지형 속에서 문 대통령의 지위와 역할, 비전 등을 분명히 본 반면 그를 몇 번 만나기도 한 나는 국내적 시각에 갇혀 전혀 보지 못한 거였다. 과문(寡聞) 그 자체인 셈이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일 지도. 그걸 미리 말해두고 싶은 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5월 10일 오전 국회의사당 중앙홀(로텐더홀)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2. “찬란한 초(初)가을.” 문 대통령은 ‘인생의 사계(四季)’에선 지금 어디쯤 서있는 것일까라고 주위에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라는 거였다. 그는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승리,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문재인의 봄은 어디쯤 자리한 것일까. 아마 서울 이문동에 자리한 경희대 캠퍼스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문 대통령은 유신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 및 강제징집됐고 특전사 제대 후 복학해 다시 전두환 군부독재에 항거하다가 1980년 청량리구치소에 투옥됐다. 다행히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풀려났고,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후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노변’과의 첫 만남을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아주 소탈하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그런 면에서 금방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느낌 같은 게 있었다.” 봄의 절정은 역시 노변과 함께 변호사로 세상으로 나아갔을 때였을 것이다.
문재인의 뜨거운 여름은 2003년 참여정부 청와대의 초대 민정수석과 함께 시작됐을 터다. 노 대통령은 당시 문 대통령을 초대 민정수석으로 소개하며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2004년 노 대통령의 탄핵 소추 당시 변호인단 간사를 맡았고, 참여정부의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9년 5월23일, 선배이자 동지였던 노 대통령을 떠나 보내며 다시 격류의 한 가운데 섰다. 그는 그때를 “생애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문재인은 이후 ‘운명’처럼 정치에 뛰어들어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됐고 18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가 패하기도 했다.
3. 취임 1년을 맞아 문재인 정부와 문 대통령에 대한 각종 평가가 쏟아진다. 스펙트럼은 “오로지 자기들의 신념에 따라 눈감고 귀닫고 좌회전에 매진한, 좋게 말해 의지의 연속이었고 비판적으로 보면 오만과 불통의 과속이었다”(김대중 조선일보 고문)는 보수층의 혹평 또는 악평에서부터 “중재자를 넘어 한반도의 운명을 개척해온 지난 1년 성과에 관한 한, 칭찬에 인색할 이유가 없다”(한겨레신문 2018년 5월9일 사설)는 격찬까지 다양하다.
크게 보면 외치(外治)와 적폐청산을 중심으로 칭찬과 호평이 많은 반면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비판이 있다. 즉 전쟁 위기로 내몰렸던 한반도에 극적인 평화를 가져온 건 잘했지만 경제 분야에선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미흡하다는 거다. 향후 과제로는 정치권 협치(協治)를 통해 큰 틀의 개혁 추진도 거론된다.
깊이 있게 천착해오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평가를 하는 건 어불성설. 대신 지난 대선 직전 만났던 소설가 강영숙씨의 새 대통령에 대한 소망을 다시 떠올려 본다. 강씨는 당시 차기 대통령은 치유와 회복을 동시에 해야 한다며 통찰력과 함께 공감능력, 감성의 리더십을 희망했다.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고 상처가 있다면 치유도 해야 하는, 회복과 치유를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이죠. 이를 위해선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국무회의에서 “추운 겨울을 촛불로 녹였던 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쉼없이 달려온 1년이었다”고 자평하며 초심을 지켜 나가자고 강조했다. 10일에도 “1년 전 그날의 초심을 다시 가다듬는다”고 했다. 문재인다운 좋은 자세이자 전략이다.
가을이란 아마 봄과 여름 동안 햇살이 만든 수많은 생명의 역동을 ‘결실’로 만드는 시기인 한편, 겨울을 미리 ‘준비’하는 시기일 것이다. 즉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김현승의 시 ‘가을’ 중에서)고 하지 않던가.
문 대통령은 어떤 결실을,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그가 이뤄내야 할 결실은 아마 김대중·노무현 1, 2기 민주정부가 추진했던 민주주의와 경제 병행발전 및 남북통일의 실질 성과를 내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의 문을 여는 일이요,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건 민주정부의 재창출일 것이다.
80%를 웃도는 국정지지도, 해외의 격찬. 좋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거나 취할 때가 절대 아니다. 초심을 다시 새기는 한편, 아직 멀리 있지만, ‘빅 피쳐(Big Picture)’를 다시 새기고 이를 위한 전략을 성공시켜야 겨울도 따뜻할 것이니. 또다시 나의 과문을 자책할지라도, 문재인의 가을이 더욱 찬란하길 바라는 이유다(2018. 5. 13).
PS. 부담스러웠다. 개인 이름을 내걸고 쓰는 연재의 첫 인물이 하필 문재인 대통령이라니. 현재 잘 하고 있는 데다가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며 개인적인 인연도 없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임 1년이라는 시의성은 말할 것도 없고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데 이어 북미 정상회담의 마중물 역할을 하면서 한반도체제 대격변의 중심에 서 있어서다. 첫 인물로 문 대통령만한 이도 없다는 판단. 쓰고 싶지 않았지만,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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