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5 (화)

[DBR/Case Study 朝鮮]폐단 심한 서원 없앴지만… ‘지방교육’ 긍정효과도 함께 사라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서원의 변질과 철폐의 한계

수련공간서 세력대결장 전락… 부작용 막으려 헐어버렸지만

근본적 문제는 해결 안되고 ‘지방교육 부실화’ 새 폐단 낳아

동아일보

조선시대 서원은 앞 세대의 훌륭한 유학자를 기리고 학문을 연구하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원은 1543년(중종 38년) 처음 세워진 후 강학(講學)과 수련의 공간으로 쓰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변질돼 갔다. 기본적으로 서원에는 존경받는 유학자의 위패가 봉안된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정신을 배우고 계승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이 봉안이 학문적 권위를 의미하게 되면서 서원은 세력 대결의 장으로 전락했다.

이런 경향은 붕당(朋黨)과 맞물리면서 더욱 심해진다. 조선의 붕당 형성에는 학연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서원이 그 학연을 매개하는 공간이었다. 같은 붕당의 서원을 늘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는 원칙마저 훼손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서원의 대표적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남설(마구잡이 건설)과 첩설(중복 건설) 등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 같은 서원의 증가는 사회적으로도 부작용을 낳았다. 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각종 의무에서 면제를 받았기에 면세특권자가 대폭 늘었고, 일반 백성의 양역(良役) 부담은 과중해졌다. 서원의 증가는 다른 한편으로 국가 재정의 부담으로도 이어졌는데, 단순 면세는 물론이고 국가 차원에서 서원의 운영, 유지 보수 비용을 지원했고 서적도 하사했기 때문이었다. 또 추가 비용은 서원 자체적으로 관아에서 차출함으로써 그 폐단은 극에 이른다.

숙종과 경종, 그리고 영조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서원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숙종은 미신고 서원 건립을 금지했으며 첩설을 단속했다. 경종은 서원에 대한 지방관아의 보조를 금지했으며 영조는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숙종의 금지 조치 이후 건립된 서원을 모두 헐어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전혀 되지 못했다. 나라에서 서원에 대한 지원을 줄이니 서원은 암암리에 백성을 더욱 괴롭히기 시작했다.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에게 비용을 부과했고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적으로 형벌을 가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폐해가 더욱 심해진 것이다.

사정이 이렇자 고종 시기 실권자 흥선대원군은 아예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해버린다. ‘제도의 하나’로서 장점도 갖고 있던 서원의 철폐는 ‘지방교육의 부실화’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이 같은 서원의 변질과 철폐 사례는 지금의 기업경영자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 조직 내에서 어떤 문제 혹은 오래된 ‘적폐’가 있을 때 그 근본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혹은 그 제도 자체가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이유, 즉 긍정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일거에 철폐하는 방식은 오히려 발전을 가로막을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철저히 찾아 제거하고 장점을 극대화해 발전시키는 것, 그게 경영의 지혜다.

김준태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akademie@skku.edu
정리=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