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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서소문 포럼] 대핵불사(大核不死)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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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핵 포기하면 체제 보장과 경제 지원 얻을 것

완전한 비핵화 완수 위해 철저한 검증과 감시 필요

중앙일보

이상렬 국제부장


20년 전 외환위기 때 경제 상황은 참담했다. 요즘 실업 문제가 심각하지만 그때완 비교가 안 된다. 위기가 한창이던 1999년 2월 실업자는 180만 명이 넘었다. 직장인들은 집단해고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역설적이지만 ‘대마불사(大馬不死:Too big to fail)’ 신화가 깨진 것은 축복이었다. 도산했을 때 생길 사회적 문제 때문에 부실 대기업을 정리하지 못하고 끙끙대던 관행이 철퇴를 맞았다. 97년에만 한보, 삼미, 진로, 기아, 뉴코아 등 부실기업이 줄줄이 쓰러졌다. 남의 돈 갖다가 사업 벌려놓고 “부도내려면 내봐라”고 소리치던 뻔뻔함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그제야 재벌과 대기업은 은행 돈 무서운 줄 제대로 알게 됐다. 금융이 금융다워지는 첫걸음을 뗀 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2018년 평화의 봄바람 속에서 이번엔 ‘대핵불사(大核不死)’의 잘못된 관념을 깨부수는 움직임이 분주하게 전개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은 핵을 버리면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세습 정권의 체제보장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화끈한 경제적 지원을 얻을 것이다. 김정은 체제는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생존을 위협한다며 있지도 않은 위협론을 내세워 핵을 개발했다. 그러곤 미국과의 대등한 협상이 가능해진 것도 핵무기를 완성했기 때문이라고 선전한다. 어리석게도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남쪽에도 있다. 김정은은 순식간에 ‘잔혹한 독재자’에서 ‘전략적인 모험가’로 둔갑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사실이 아니다. 한반도의 해빙은 북한이 핵 무력을 완성한 시점이 아니라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지점에서 시작됐다. ‘대핵불사’란 애초부터 망상이었다. 그 사이 북한 주민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한반도는 전쟁의 공포에 떨었다. 북한을 완전히 비핵화시키는 것은 지난한 과제다. 철저한 검증과 감시가 오랜 기간 흔들림 없이 지속돼야 한다.

이쯤 해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우선 남쪽의 순진함이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안이하긴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이렇게 무서운 속도로 핵무기 개발에 성과를 낼지 몰랐다. 일취월장하는 북한의 핵기술 발전 속도를 과소평가했고, 고난의 행군을 이어온 북한 사회가 어지간한 제재는 너끈히 견딜 수 있는 자생력을 갖췄음을 간과했다.

다음은 미국의 오판. 버락 오바마 대통령(2009~2017년)의 8년 재임 기간에 유지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는 북한에 대한 무시 일변도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북한엔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 충분한 시간을 벌어줬다. 미국이 주도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대북 제재는 북한의 핵 개발 야심을 꺾을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다. 미국이 북핵을 막겠다고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건 미국 본토까지 때릴 수 있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나서였다. 미국도 발 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움직인 것이다.

중국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은 북핵이 문제 된 이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한·미 연합훈련을 동시에 중단하자는 쌍중단(雙中斷)을 고집하며 북한 편을 들었다.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결의를 매번 훼방 놓은 건 중국이었다. 북한 미사일을 감시하려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의 배치에 ‘한한령’과 한국 관광 금지로 줄기차게 보복했던 중국이다. 만약 중국이 그런 자세로 결연하게 나섰더라면 북한의 핵 개발은 진작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북핵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이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나온 데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감사 인사를 연발했다. 그들의 ‘공치사’를 듣는 것은 불편하기만 하다. 강대국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주판알을 튕길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안이함이나 순진함을 부릴 여유가 없다.

이상렬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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