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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조선 세종의 ‘위징’ 용기 있는 처세의 재상 허조 | ‘반대파’가 아닌 ‘충성스런 반대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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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지 않았다. 이상적이고 창의적인 세종의 아이디어를 현실에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 또 실용적으로 더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반대와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허조는 자신이 모시는 군주가 법과 예, 제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신하의 역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한마디로 ‘반대파’가 아니라 ‘충성스런 반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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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맹사성과 함께 세종 3대 정승

허조는 세종 때 황희, 맹사성과 함께 3대 정승으로 손꼽힐 만큼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인물이다. 비록 황희나 맹사성에 비해 그 위명은 덜했지만 세종 조에 조선의 예학, 법 제도, 인사, 행정의 틀이 완비될 수 있었던 것은 허조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허조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아니되옵니다” “제 의견은 다릅니다” “신 허조 홀로 아룁니다”라고 수없이 외친 굳은 신념과 무너지지 않는 원칙에 있다.

너그러운 세종마저 “허조는 그야말로 고집불통이다”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허조는 법과 원칙에 있어서는 비록 ‘왕의 말과 행동’이라도 반론을 제기하고, 제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 완벽한 리더십을 보여준 군주며 세종 이후 조선의 왕들은 모두 ‘제2의 세종’이 되고자 원했지만 ‘흉내 정도의 노력’과 ‘중도 혹은 애초 포기’에 그치고 말았다. 세종 리더십의 핵심은 ‘애민’이다. 이를 위해 세종은 제도를 만들고 그 운용에 힘을 쏟았다.

사가들은 세종 리더십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 적재적소에 기용한 용인술에 있다고 한다. 황희, 맹사성, 허조, 신개, 최윤덕, 김종서, 신숙주, 성삼문 등 세종의 업적을 뒷받침한 기라성 같은 명신들이 있어 세종은 그 치세를 빛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명신들의 가치를 더 빛낸 것은 세종이 왕권과 신권, 보수와 진보, 유학과 법치 등에서 치우침 없는 균형과 합의된 소통의 조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세종은 귀에 부드럽고 입에 달콤한 말만을 원하지 않았고 쓰고 날카로운 고언을 받아들였다. 즉 명신을 쓸 정도의 인덕과 능력이 세종에게 있었기에 명신의 명망이 더욱 높았던 것이다.

세종 용인술의 대표적인 인물이 허조다. 허조는 고려 말 과거에 급제해 조선 개국 시 관직에 있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눈에 들어 신임을 받았고 태종이 각별히 애정했던 인물이다. 태종이 허조를 불러 세종에게 “주상, 허조는 크게 써 중용하세요. 왕의 디딤돌이 될 인물입니다”라고 특별히 천거했다. 허조는 태종 시대 조선의 예학을 다듬고 정비하는 데 그 능력을 썼다.

하지만 세종은 허조의 강직한 성품, 치밀한 일 처리, 청렴한 생활, 엄격한 공사 구분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게 조정의 인사를 맡겼다. 허조는 10년 동안 이조판서를 역임하며 세종 치세를 빛낸 인재를 발굴하고 운영하며 관리한 세종의 인사참모였다. 이러한 허조의 헌신적인 노력과 충성이 있었기에 세종은 관료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세종 3대 정승 황희, 맹사성, 허조의 절묘한 역할 분담을 보면서 이들도 대단하지만 오히려 이들을 부린 세종의 안목을 칭찬한다. 즉 유교에 기초한 덕과 인으로 중용의 정치를 펼친 황희는 ‘유가’, 유유자적하면서도 너그러운 맹사성은 ‘도가’, 원칙에 입각해 한 치 흐트러짐이 없이 정사를 돌본 허조는 ‘법가’의 정신으로 구분하며 세종 용인술의 정점을 이 세 명의 등용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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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으로 인재 등용과 학자 양성, 실용 기술 개발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예와 원칙, 법과 제도의 수호자

허조는 공양왕 2년 1390년 즉 고려 멸망 2년 전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등용됐다. 이후 바로 조선이 개국되자 잠시 주저했지만 위민의 큰 뜻을 품고 관직에 다시 나갔다. 태조는 허조가 예학에 밝은 것을 알고 그를 개국 초기 예학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중용했다. 허조는 좌보궐, 봉상시를 역임하고 각처에 학당을 세워 유교를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태조는 조선 건국 이념으로 불교를 억제하고 군신 간의 충성과 신의를 강조한 유학을 보급하는 데 주력했는데 이를 이론적으로 정비하고 실용적으로 쓰이게 하는 중책을 허조가 맡은 것이다. 허조가 국가 제례나 왕실 행사를 주관하는 봉상시승으로 근무할 때의 나이가 불과 이십 대 초반이었다. 태조가 허조를 신임하기도 했지만 허조의 학문과 인품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허조는 주자학 신봉자였다. 훗날 관리들은 허조를 ‘주공(周公)’이라 빗대어 불렀는데 이는 허조가 항상 “주공에 따르면, 주례에 따르면, 주자가 말하기를”을 반복해 붙은 별명이다. 이처럼 허조는 조선의 건국 이념과 자신의 학문적 가치관으로 주자학을 따랐다. 특히 부모상을 당하자 그때까지도 남아 있는 불교식 장례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주례에 입각해 상을 모셨다고 한다. 허조의 예외 없는 원칙 즉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허조는 법과 원칙 앞에서는 남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때의 일화가 있다.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등용되면 자신이 본 과거 시험을 주제한 시험관을 ‘은사’로 모시고 평생 존경하는 것이 관례였다. 허조가 과거에 급제할 때 시험관은 고려 명신 염제신의 아들인 염정수였다. 그는 목은 이색의 학문을 잇는 대학자였다. 하지만 고려 말 격동기에 염정수는 정치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했다. 염정수의 제자는 물론 부하들까지 아무도 염정수의 시신을 거두거나 슬퍼하지 못했다. 괜한 피해를 볼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허조는 당당하게 찾아가 염정수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곡을 하고 장사를 지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문상이었다. 그만큼 허조는 자신의 행동에 당당했다. 그래서일까, 한양에서 근무하던 허조는 지방관으로 좌천 당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 때문에 당시 권력의 주류와 불편했던 관계의 결과다. 허조의 꼿꼿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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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 당(唐)나라 초기의 공신이자 학자로 태종의 부름을 받아 요직을 거친 뒤 재상으로 중용되었다. 굽힐 줄 모르는 직간으로 유명하다.


▶황희가 알아보고 태종이 인정하다

허조의 이 같은 성격은 임금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태종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태종은 왕권을 위해 같이 칼을 들었던 공신은 물론 처남들까지도 피의 숙청을 단행한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런 태종의 즐거움 중 하나가 매를 이용한 사냥이었다. 태종은 매를 좋아해 궁중에 ‘응방’이라는 매를 기르는 부서를 두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응방인’이었는데 이들은 태종을 믿고 위세가 등등했다. 응방인들은 직급과 신분에 상관없이 안하무인으로 세를 과시했고 관리들은 태종이 무서워 이들 패거리의 못된 짓을 못 본 척했다. 당시 허조는 감찰을 담당하는 직책에 있었다. 허조는 이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이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허조를 불러 엄하게 물었다.

보통의 신하라면 진노한 태종의 목소리만 들어도 벌벌 떠는데 허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들의 행동은 직분을 뛰어넘습니다. 자칫 나라의 기강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냥에 쓰는 매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지면 되겠습니까?”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태종은 할 말이 없었다. 듣기는 싫었지만 허조의 말은 당연하고 옳았다. 그럼에도 태종은 허조를 곁에 두지 않았다.

황희는 허조를 높이 평가했다. 황희는 태종에게 “허조는 나라의 기둥이 될 자입니다. 군주는 간언을 올리는 강직한 신하를 곁에 두셔야 합니다”라고 천거해 태종도 허조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황희는 자신이 맡은 직책에 후임자로 허조를 추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태종은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이조정랑은 품계는 낮았지만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중책이었다. 원칙이 있고 공사 구분이 뚜렷하며 무엇보다 날카로움과 중용을 갖춘 인물이 발탁되는 자리였다. 태종은 마땅한 인물이 없어 고심하다 천거된 인물들을 하나씩 다시 살폈다. 그리고 무릎을 치며 적임자를 생각해냈다. 바로 허조였다. 태종은 이조정랑으로 허조를 임명하고 “내가 사람을 얻었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자신에게조차 매사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냥 보고 넘기는 것이 없는 허조지만 태종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는 안목을 갖춘 군왕이었다.

태종은 허조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했다. 일종의 경력 관리였다. 명나라 사신단에도 포함시켜 견문을 넓히게 했고 예조참의로 임명해 조선의 예학을 정비하게 했다. 그리고 허조를 곧 예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했다.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세종의 왕권 확립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허조를 예조판서로 임명해 조선의 모든 예학과 제례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태종은 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세종을 비롯해 모든 문무대신이 참석했다. 태종은 허조를 불렀다. 그리고 친히 허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세종에게 당부했다. “주상, 허조는 내게 ‘주석(柱石)’과 같은 인재요”라며 허조에게는 “앞으로 나를 모시듯이 주상을 잘 보필하라”고 말했다. 허조는 감격하여 엎드려 절하고 충성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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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세종의 최고 인사참모로 일하다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 허조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애민의 통치를 했다. 특히 세종은 허조를 이조판서로 임명했다. 이조는 관리 인사를 총괄하는 중추 부서다. 왕실은 물론 세도가, 재상, 문파, 족벌 등의 청탁과 민원이 빗발치는 자리인 만큼, 세종은 허조의 빈틈없는 성격과 원칙주의, 엄격한 공사 구분을 높이 평가해 막중한 자리에 앉힌 것이다. 허조는 이조판서로 무려 10년을 근무하며 세종의 통치 철학을 관료 집단에 전달했다.

세종은 명군이었지만 초창기 대신들의 심복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물론 태조까지 모신 역대 중신들로, 은근히 ‘나는 태종의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세종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권위와 명령으로 그들을 복종시키지 않고 진심과 능력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허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종이 종묘에서 제례를 지냈다. 허조는 세종에게 잔을 건네는 역할을 맡았다. 종묘는 조선의 정신적 뿌리며 역대 군왕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이곳에서 제를 올리는 것은 그 어떤 왕실 행사보다 엄격하고 정중했다. 허조는 조심스럽게 세종에게 잔을 올리고 내려오다 그만 계단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허조를 비롯해 제례에 참석했던 모든 관리들은 경악했다. 국가대사를 망쳤으니 이제 허조는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 세종이 “이조판서는 다치지 않았는가? 이 계단이 좁아 잘 넘어질 수 있다. 계단을 넓히도록 하라”고 말하며 허조의 손을 잡았다. 허조의 허물을 세종이 먼저 덮은 것이다. 허조는 세종의 넓은 마음에 감격하고 이후 세종에게 심복했다.

허조는 군왕에 대한 충성을 자신이 맡은 바 직무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창의적이고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 능했던 세종은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제시했다. 그때마다 황희는 물론이고 허조가 나서 실용적이고 시행 가능한 현실적인 정책이 먼저라고 간했다. 세종은 “신 허조 홀로 아룁니다”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지만 허조의 강직함과 성실함을 알기에 가까이 두고 신임했다.

허조는 이조판서로 재직하며 인재를 발굴하고 기용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조정의 하급 관리는 물론이고 지방관아에 근무하는 관리도 발탁했는데 그중에는 허조와 친분이 있는 이와 친척들도 있었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 여러 말이 흘러나왔다. “허조가 사적인 인연을 중시해 가까운 사람을 관리로 채용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를 세종도 듣게 되었다. 세종은 허조를 불렀다. “요즘 이조판서가 사적인 기준으로 관리를 쓴다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묻자 허조는 주저 않고 답했다.

“전하,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인재라면 비록 저와 친하거나 친척이라 하더라도 등용해야 할 것이며, 만일 능력이 부족하다면 제가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재를 얻어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의심이 있으면 애초에 일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대신을 육조의 장으로 삼으시며 일을 맡겨 주셨으면 작고 사소한 일은 간섭치 않는 것이 옳은 듯하옵니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의견이었다. 세종 또한 허조의 말 뜻과 의도를 알기에 더 이상 관여치 않았다.

허조는 관리 등용을 위해 3단계 검증 제도를 만들었다. 인사 실무를 담당하는 이조낭관이 관리를 추천할 때는 먼저 경력, 자질, 부패, 가족관계까지 면밀하게 살핀다. 그런 다음 이조의 각 담당관들이 모여 그에 관해 전체적으로 평론을 매기면서 더 적임자는 없는지 한 번 더 검증했다. 마지막으로 이조뿐 아니라 다른 부서 관리들이 모여 전체적인 평점을 매겼다. 이렇게 3단계를 통과하는 과정에 부정한 청탁이나 사소한 인연이 개입될 수 없었다.

허조가 만든 또 한 가지 인사 제도는 바로 ‘수령육기법’이다. 관리들을 한양에서 3년, 지방에서 6년을 순환 근무토록 한 것이다. 그 전에는 ‘수령삼기법’이라 하여 한양에서 1년 6개월 근무하고 지방으로 가 3년을 근무했다. 그러다 보니 지방으로 간 관원들은 한양으로 올라갈 생각에, 한양 관원은 얼마 안 있으면 지방으로 좌천한다는 생각에 행정 지속력이 떨어졌다. 이를 세종이 지적하자 허조는 수령육기법을 만들었고 이는 조선 말까지 관원의 이동에 관한 법으로 적용되었다.

허조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제도가 있다. 바로 ‘부민고소금지법’이다. 이 제도는 법이 만들어진 세종 시대는 물론 그 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부하가 상사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즉 자리싸움이나 사소한 개인 관계로 상사를 모함, 무고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윗사람들이 기강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또한 고소에 시달리는 폐해를 막기 위한 법이었다. 그러자 부하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사를 고발할 창구가 없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 법을 두고 세종과 허조는 물론 관료들간에 많은 논의와 토론이 있었다. 허조는 이 법의 존치를 강하게 주장했다. 부작용보다 장점이 많다면 제도를 보완하면서 실행하자는 의견이었다. 결국 세종은 특별 감찰을 많이 활용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당사자는 고발이 가능하다는 선에서 부민고소금지법을 존치시켰다.

허조가 존치를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관리들의 신변 보장’ ‘업무의 지속성’ ‘상명하복의 원칙’도 있었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쓰지 말고 한 번 등용했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사람에 대한 철학의 힘을 강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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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는 엄격, 남에게는 관대

사람들은 허조를 ‘주공’이라 칭했지만 ‘수응재상(瘦鷹宰相)’, 즉 ‘송골매 대신’이라고도 불렀다. 그의 외모가 척추가 굽고 마른 체격인기도 했지만 아마도 송골매처럼 날카롭고 매서워 젊은 관원들이 그를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해 붙인 별명일 듯하다. 허조는 깐깐하고 원칙만 따르는 융통성 없는 선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성품은 순진하고 조심성이 많았으며 남의 과실이나 흉을 보지 않았다’거나 ‘친구들에게 매우 신용이 있었으며 친구의 경조사나 문병을 빠지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허조의 따뜻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허조는 정책에 있어서도 융통성이 있었다. 그는 죄인에게 문신 즉 자자를 새겨 넣는 것에 반대했다. 이는 세종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형벌이었다. 당시 형조에서는 노인이나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자자를 새겼다. 허조는 “죄가 있어도 어린아이와 노인에게는 매질을 하는 것도 조심하는데 자자를 새기는 고통을 주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주장해 예외 없던 자자 규정을 폐지했다. 또한 대국이라 하여 공경하는 명나라의 제도나 풍습에 대해서도 허조는 비판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말 1만 필을 보내라 명하자, 허조는 “기병 1만 명이 사용할 군마를 그렇게 보내면 우리 국방은 무너지고 만다”고 반대했다. 또한 영락제가 죽어 그가 후궁과 함께 무려 15명을 순장한다는 소식을 듣자 “허수아비로라도 순장을 하면 후손이 끊어진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데 명나라에서 궁녀 15명을 순장한다니, 대국의 풍습이라 해도 배울 것이 전혀 못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번은 조정에서 지방 관아의 기생을 없애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찬반양론이 치열했다. 그러자 관료들은 허조에게 의견을 묻기로 했다. 그들은 당연히 기생을 없애자는 것에 허조가 찬성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허조는 반대했다. 허조는 “남녀간 정은 법이나 강제로 금할 수가 없다. 만약에 기생을 없애면 젊은 관리들이 풍속을 해치는 경우가 더 늘어날 것이다. 모든 제도와 법에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원칙주의자 허조의 또 다른 면모였다.

그럼에도 허조에게는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부정부패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는 조말생의 뇌물 사건이 터졌다. 조사관들의 보고를 받은 세종은 “파직으로 그 죄를 다하라”고 명했지만 허조는 강력하게 조말생에게 중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과 유학을 배운 자, 나라의 녹을 받는 자에게 법과 원칙은 더 엄중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허조의 신념이었다. 이 같은 허조였기에 세종은 허조를 신임하고 그에게 조선의 인사권을 무려 10년간 맡긴 것이다.

허조는 집 안이라 해서 원칙과 법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아들이 허물이 있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허조는 사당에 고하고 아들을 벌주었고 집에서 부리던 노비가 죄를 지어도 엄하게 다스렸다.

평생 어머니가 지어준 옷 두 벌이 전부였고 물욕도 없었다. 허조의 동생이 단명하자 제수씨가 허조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양자로 들이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양자로 들어오면 내가 평생 모은 재산을 다 물려주겠다”고 하자 허조는 “사람이 노력 없이 재물이 생기면 잘못될 수 있다. 재물을 물려준다니 그러면 내 아들을 양자로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들 정도로 자기관리에 치열한 삶을 산 것이다.

한번은 집에 도둑이 들었다. 훔쳐 갈 것도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부인이 살림을 아껴 장만한 물건들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옆에서 도둑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허조에게 부인이 원망 섞인 말을 하자 허조는 “지금 내 마음속에는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들어 싸우고 있는데 내가 무슨 여유가 있어 마음 밖 도둑 걱정을 할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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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조선의 최고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황희. 태종에게 허조를 천거해 이후 세종으로 이어지는 허조의 활약을 도왔다.


▶세종의 ‘위징’, 임무를 다하다

허조는 정승 반열에 늦게 올랐다. 아마도 허조의 대쪽 같은 성품이 각 부서와 집단의 이익과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정승 자리와는 잘 맞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1438년 허조는 69세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에게 걸맞은 벼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1439년 좌의정이 되었지만 그해 가을에 깊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허조의 나이 70세였다. 끊임없이 ‘No!’를 외친 ‘세종의 위징’이 떠난 것이다. 세종은 허조의 별세 소식을 듣고 깊이 슬퍼하며 사흘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허조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랬다. “내가 태평한 시대에 태어나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올랐다. 더구나 현명한 군주를 만나 내가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허조 역시 자신의 역할이지만 수십 년을 옆에 두면서 자신의 간언과 쓴소리를 들어준 세종에게 고마움과 충성의 마음을 내보인 것이다.

허조는 세종을 모신 종묘에 위패를 둔 배향 공신으로 뽑혔다. 배향 공신은 세종의 업적을 빛낸 신하 중에서도 각별한 이를 뽑는 것으로 허조의 탁월한 공과 충성심을 후대도 인정한 셈이다. 세종의 배향 공신은 총 7명이다. 이 가운데 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그리고 세종의 스승인 이수를 제외하고, 신하 중에서는 황희, 허조, 최윤덕, 신개가 배향되었다. 아마도 허조는 죽어서도 여전히 세종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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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각 왕대에 국가 통치 전반에 걸쳐 가장 대표적인 활약을 했던 신료를 배향공신으로 선정해 임금과 함께 신주를 모셨다. 허조는 세종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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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학 | 반대파가 아닌 ‘충성스런 반대자’가 되라

허조는 이른바 소수파였다. 소수파는 주류가 아니다. 항상 외롭고 다수파의 이익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소수파가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전투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절제와 엄격함이다. 즉 단점과 약점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허조의 처세는 100점이었다. 인격, 학문, 성품, 재산, 처신에서 허조는 다른 이의 시선으로 보면 흠 잡을 데가 없는 ‘가장 까다로운 적’인 셈이다.

군주제에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절대자에게 ‘No!’라고 말하는 것은 목숨을 건 용기이다. 또한 스스로 뒤돌아보아 결점이나 작은 허물도 없어야 하고, 자신에게 엄격해야 가능한 일이다. 허조는 그 점에서 완벽했다. 그는 청렴하고 성실했으며, 공사 구분이 서릿발 같았다. 그렇기에 허조는 임금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었고, 비록 임금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이런 임금의 기색을 눈치챈 신하들이 그를 모함하거나 무고해도 살아날 수 있었다.

22세에 관직에 들어와 70세에 좌의정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허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즉 ‘군왕을 견제하고 그것으로 애민이 가능케 하고 군왕의 위명을 오히려 높이는 신하의 자세’를 수행했다.

허조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지 않았다. 이상적이고 창의적인 세종의 아이디어를 현실에 적응시키기 위해, 실용적으로 더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반대와 간언을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이 모시는 군주가 법과 예, 제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침묵하는 것은 결코 신하의 역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한마디로 ‘반대파’가 아닌 ‘충성스런 반대자’였다.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문제점과 해결 방안, 대안을 제시하는 충성스런 반대파의 역할은 ‘무조건적 충성파’에 비해 그 효력과 쓸모가 훨씬 높은 법이다. 물론 세종이라는 최고의 리더, 군주가 있었기에 허조의 역할이 더 돋보이고 빛난 것은 틀림없다. 세종과 허조는 군신간을 떠나 조직에서 가장 완벽한 역할론, 즉 1등 리더와 1등 참모의 위치에서 균형과 견제를 이룬 것이다.

그에게서 배운다. 달콤한 미사여구도 처세술의 방법이지만 쓴소리, 옳은 소리, 듣기 싫은 소리를 평생 할 수 있는 진정한 처세의 방법을. 그것은 엄격한 자기 절제가 전제다. 이 점이 스스로를 높이고 군주 역시 현군으로 만드는 진정한 처세인 것이다. 물론 이런 처세는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해 품에 안아야 한다’는 말을 실천할 도량을 갖춘 일인자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사가들은 허조가 단 2년 정승직에 있었지만 그를 세종시대를 빛낸 정승으로 손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허조가 리더의 철학을 이해하고, 리더의 목표를 인지한 참모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처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조는 처세를 떼어 놓으면 각각 해석이 가능한 ‘충성’과 ‘반대’의 조합, 즉 ‘충성스런 반대자’였다. 이 두 가지의 균형감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조직에도 필요한 처세임에 틀림없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위키미디어,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26호 (18.05.01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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