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세계-가축 살처분 트라우마①] 실태 및 전문가 대책
군 제대 후 충북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돼지농장을 물려받아 운영하던 20대 후반의 A씨는 어머니에게 짤막한 글을 남기고 2011년 세상을 등졌다.
A씨는 구제역이 유행하면서 정성껏 기르던 돼지 300마리를 살처분했고 이후 돼지들이 울부짖는 환청에 시달렸다. 심리 부검 결과 A씨의 비극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판명됐다.
지난 3월 19일 오전 경기 평택 오성면 양교리의 한 산란계농가에서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살처분 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
충남의 한 축협에서 돼지 축사 관리 일을 하던 40대 남성 B씨도 201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B씨는 2010년 12월 구제역이 발생하자 가축 살처분 매몰 작업을 하며 갓 태어난 새끼를 포함해 소·돼지 등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야 했다.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불면증·조울증과 위염·십이지장궤양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 의뢰해 ‘가축 살처분 트라우마 현황 실태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가축 살처분 참여자 4명 중 3명이 심리적 외상으로 인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전·사후 관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 국가적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스1 |
◆자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살처분 참여자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가축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과 수의사 등 277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10~12월 온라인 설문 방식으로 PTSD를 겪는지를 조사한 결과 PTSD 판정 기준인 25점을 넘긴 응답자는 전체의 7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심층 면접 조사에 응한 40명의 공무원·수의사·군인 등은 자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살처분 현장에서 인력들을 지휘하는 통솔자 역할을 하는 C씨는 “매몰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고 때려서라도 죽여서 묻어야 하는 ‘학살의 주체’가 돼야 하는 상황”이라며 “죽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자괴감에 빠진다”고 괴로워했다.
수의사로 보이는 한 참여자 D씨는 “직업에 대해 자괴감에 빠진다. 동물한테 도덕적·윤리적 자책감을 느낀다”며 “사명감을 갖고 일하면서도 ‘이것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중 인간’이 돼버린다”고 혼란스러워했다.
연구소는 “살처분 현장에서 위험에 노출된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에게 처우 개선 및 체계적인 사후조치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조류인플루엔자(AI) 살처분을 위해 특전사 천마부대 장병들이 전북 김제시 용지면 효정마을 내 한 양계장으로 투입되고 있다. 연합뉴스 |
◆가축 살처분 참여자 대상 교육·안내·관리 無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가축 살처분 작업에 투입된 참여자들에 대한 사전 교육도, 사후 관리도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군 복무 중 돼지 살처분 현장에 투입된 경험이 있다는 회사원 조모(31)씨는 “살처분 작업 후에는 한동안 돼지고기 등 육류를 피했다”며 “특히 생고기를 보면 역해 쳐다보기도 힘들었고, 피를 보면 소름이 돋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힘든데 관련 교육이나 이후 관리를 해준 경우는 전혀 없었다”며 “동기들도 서로 입 밖으로 힘들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고 혼자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경기도 김포에서 돼지 농장을 운영하는 정모(37)씨는 살처분 작업 후 정신건강과 관련한 치료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호소했다. 그는 “공무원들이 와서 위로는 하지만 정신적인 치료에 관한 교육도 안내도 따로 없었다”며 “손해가 크고 충격이 컸던 주변 농장주들은 살처분을 한 번 겪고 나면 농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실태조사 시행 후 그 결과를 토대로 정책 검토 중”이라며 “검토 과정에서는 실태조사 결과뿐만 아니라 다른 자료도 보충해 접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2월 7일 충북과 전북에서 잇따라 구제역이 발생하자 강원 춘천시의 한 축산농가가 출입을 통제하고 방역을 강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전문가들 “동물과 사람이 받는 고통을 함께 생각해야”
전문가들은 동물과 사람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살처분 방법에 대한 고민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번 연구를 수행한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살처분이 이뤄지는 순간 동물들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고통을 받는다”며 “그것이 바로 트라우마로 남고 정신 건강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천 교수는 이어 “분명히 고통이라는 것은 동물과 사람에게 동시에 온다”며 “살처분이 이뤄지는 열악한 환경이 동물과 사람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그러면서 “현재 이뤄지는 살처분 방법이 경제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사람이나 사회에 주는 영향을 생각하면 더 확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며 “하루빨리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연 기자 delays@segye.com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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