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은 북·미 정상회담의
예비회담이 돼선 결코 안 된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
두 회담 모두 본회담이 돼야 하고
한·미는 단일 목소리를 내야 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
금번 정상회담은 대한민국과 문재인 대통령의 3대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핵 문제를 회담의 핵심 의제로 삼은 점이다. 핵 위기 발생 이후 북한은 핵(과 ICBM) 문제는 남한을 배제한 채 미국하고만 논의하려 해 왔다. 남한이 북한과 비핵·평화의 일대일 논의 주체로 자리매김한 것은 향후의 남북관계, 한반도 평화구축 과정에서 확고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정상회담의 최고 목표를 오직 국가 안보와 평화 구축에 둔 것이다. 평화는 금번 정상회담의 출발 가치이자 귀결 목표다. 일체의 민족주의·동질성·분단담론·통일주의의 문제의식과 언설이 정상회담 준비 도정에서 배제된 것은 우리가 비로소 한반도 문제의 본질에 도달했음을 증거한다. 진보 대 보수, 온건 대 강경의 이분법을 넘은 냉정한 현실주의 정책의 산물이다. 단일민족, 민족 분단, 동질성 회복, 통일 준비와 같은 허구의 담론들은 좌우 민족주의와 남남갈등, 이념 대결의 분출을 야기할 뿐 세계안보·평화 문제인 북핵·ICBM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핵·ICBM 문제의 해결을 방해해 왔다.
셋째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북·미 사이의 대화를 중재·연결·회복한 것이다. 지금 북한과 미국은 한국과 문재인을 매개로 유사 이래 가장 가깝다. 북·미 정상회담은 역사상 최초다. 지난 30년 노태우-부시 1세, 김영삼-클린턴, 김대중-클린턴, 노무현-부시 2세, 이명박-오바마, 박근혜-오바마, 문재인-트럼프의 조합이 보여주는 진실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가 미국 정부의 강경-온건 정책은 물론, 사실상 한국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명림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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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부터 시작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북·미 정상회담의 예비회담이 돼선 결코 안 된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은 둘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다. 한·미는 비핵·평화 의제에 대해 단일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구체적 이행과정조차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미 일치에 두 회담, 나아가 한반도 비핵·평화의 성패가 달려 있다. 두 정상회담 모두 본회담이고 본질적 회담이 돼야 한다.
북한의 핵실험 및 ICBM 발사 실험 중단, 핵실험장 폐기, 핵무기·핵기술 불이전 약속들은 비핵화의 4단계, 즉 핵 활동 중지, 핵 동결, 핵 불능(화), 핵 폐기 중 앞 두 단계를 미리 천명한 셈이다. 즉 한반도의 큰 방향이 핵무장에서 비핵화로, 대결에서 대화로 대전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초기 흐름일 뿐 궁극적 비핵·평화의 목표 달성은 정녕 멀다.
일찍이 사실주의의 문을 연, 그리하여 문학·사상·학문에 큰 영향을 끼친 플로베르가 말했듯 신은 디테일에 있다. 신이 인간에게 준 지혜는 마땅히 구체를 통해 작동해야 한다. 평화를 향한 한 조치 한 조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신의 영역일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 구체다. 즉 신이 돕고 싶을 만큼 디테일에서 사력을 다해야 한다. 사력을 다하지 않아도 달성되는 구체는 없다. 구체가 결렬되면 전체도 없다.
난세는 늘 ‘불행한 행운’이다. 난세 자체는 불행이지만 극복의 대업을 이루면 영웅이 될 수 있기에 행운이다. 따라서 불행이 혹독하면 행운은 더욱 크다. 핵전쟁의 위기가 칼끝으로 치달을 만큼 컸었으니 옛 전선에서 불어올 평화의 훈풍은 우리의 온몸과 온 영혼을 한껏 감싸안아 줄 것이다.
참혹한 세계 내전을 치른 국민들로서는 참 평화가 안겨줄 만당한 기쁨보다 더 큰 바람은 없다. 평화가 치유요 회복이요 기쁨인 것이다. 목숨을 다해 회담에 임하기를 소망한다. 평화가 목숨이기 때문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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