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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100년 전 고전문학 ‘방한림전’에서 페미니즘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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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구적 페미니즘이 수용되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도 페미니즘 사유와 활동은 존재했다.”

신간 <한국 고전문학의 여성적 시각>(소명출판) 저자인 박혜숙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책에 수록된 논문 ‘여성영웅소설과 평등·차이·정체성의 문제’에서 이같이 말한다. 박 교수는 논문에서 조선 후기 성행한 여성영웅소설에서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들의 문제의식이 드러난다고 해석했다. 대개 여성영웅소설에서 주인공은 부모나 남성의 부재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부모를 대신해 설원하거나 가문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전 소설의 여성 주인공들이 이런 위기에 비탄의 눈물을 흘리거나 인고하면서 기다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박 교수는 “여성영웅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주목할 작품은 <방한림전>이다. 연대·작자 미상의 통속 소설이다. 19세기 말,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명 시절 북경 유화촌에 사는 여성 주인공 방관주는 과거에 응시해 문·무 양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한림학사가 된다. 그는 평생 남장을 했고, 동성인 영혜빙과 결혼했으며 입양한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성을 잇게 한다.

여성영웅소설에서 흔한 ‘남장’이라는 요소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된다. “여성의 남장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구현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박 교수는 이를 “단순한 남성 선망이 아니라 남성들이 독점하는 독립성과 자유에 대한 선망이며, 남성과 평등해지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일시적인 남장이 아니라, 평생 남장을 했다는 점에서 방관주는 다른 소설 주인공보다 문제적 인물이다. “방관주는 결혼으로 인해 여성이 다시 집안의 존재로 고착되는 것을 거부”하고 “남성과의 철저한 동일성을 추구”했다. 남성과 여성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평등의 페미니즘’을 극단까지 추구한 인물인 셈이다.

박 교수는 여성성을 배제하는 ‘평등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방한림전>의 또 다른 주인공 영혜빙의 사례를 제시한다. “영혜빙은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은 남자의 구속을 받아 만사에 자유롭지 못하니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방관주의 정체를 꿰뚫어본 뒤 ‘평등한 결혼 관계’는 받아들였다. 영혜빙은 충실하게 아내와 엄마 역할을 해냈는데, 박 교수는 “여성인 채로 주체성과 평등을 추구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방관주와 영혜빙은 서로의 역할은 다르지만 상호의존하고 공생하면서 가부장제에 공동대응했다”는 게 박 교수의 해석이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가부장제 질서를 온전히 구현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박 교수는 “방관주의 남성화 경향을 현상형태 그대로 평가하는가, 아니면 가부장제 사회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평등 추구라는 심층적 동기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설명한다.

<한국 고전문학의 여성적 시각>은 박 교수가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연구·발표한 논문들을 엮은 책이다. 서사한시, 고려속요, 여성영웅소설 등 고전문학 장르의 여성담론을 이론적으로 분석한다. <방한림전>을 비롯한 여성영웅소설에 나타난 여성적 시각에 대한 국내 연구는 꽤 오래 전부터 진행돼왔다. 그런데도 대중적으로 익숙한 작품은 아니다. 박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통속적, 의식 수준이 높지 않다는 평가에 밀려 있던 고전 작품들을 여성적 시각에서 보면 가부장제 사회 여성들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드러나기도 한다”면서 “대개 남성영웅소설, 기득권 주류 남성들의 작품들만 고전문학의 정전처럼 여겨져 왔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현대적 페미니즘 관점에서 <방한림전>을 완벽하게 해석할 순 없지만 시대적·역사적인 차이를 고려하고, 작품 안에 구현된 당대 여성들의 고민을 보면 역사적 진전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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