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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이로사의 신콜렉터]흑백·젠더 경계 넘어 그녀들이 꿈꾸는 곳, 핑크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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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넬 모네이 ‘PYNK’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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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저넬 모네이의 새 싱글 ‘핑크(PYNK)’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이후 인터넷 공간에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 영상에서 저넬 모네이를 비롯한 흑인 여성들은 이른바 ‘보지 바지’로 불리는, 여성의 성기를 형상화한 것이 명백한 넓은 통의 바지를 입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제목처럼 ‘핑크’색 여성 생식기의 이미지들이 흘러넘치는 이 뮤직비디오는, 그러나 단지 선정적인 관심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새로운 세계, 젠더의 경계를 넘어선 사랑과 자유의 세계, 이 세계에 없는 ‘핑크’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영상이 시작되면, 핑크색 대지의 핑크색 바위와 풀들 사이로 핑크색 컨버터블을 탄 핑크 여전사들이 등장한다. 그곳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먹고 쉴 수 있는 ‘핑크 쉼터 여관(PYNK REST INN)’이 있는 곳이다. 이윽고 핑크색 절벽이 우뚝한 대지 위, 나란히 선 7명의 흑인 여성들은 붉은색 넓은 라펠(옷이 접힌 부분)의 바지를 입고 있다. 노래가 시작되고, 이들은 트렌디한 디지털 사운드에 맞춰 귀엽고도 우아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들의 다리 가운데 자리한 붉은 꽃과 같은, 커다랗고 아름다운 여성의 성기는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오므려지고 벌어지고 접히고 나풀거린다.



이어 저넬 모네이의 다리 사이로 다른 여성(배우 테사 톰슨)의 머리가 빠져나오거나, 생굴, 핑크빛 도넛과 그 사이로 집어넣은 손가락, 자몽과 그 위에 놓인 얼음 조각, 빨간 꽃잎, 거품이 이는 분홍빛 음료수와 같은, 여성의 생식기를 은유하거나 상징하거나 연상케 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이 영상 전체에 걸쳐 폭격하듯 쏟아진다. 그것은 분명 관능적이지만, 남성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에 경쾌하고 자유롭다.

여성의 생식기 은유·상징하는 이미지들

관능적이지만 남성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경쾌·자유로워

여성의 상징 색 ‘핑크’를 새롭게 정의

우리 가장 깊은 곳의 색, 젠더 넘어 모두를 연결시키는 색으로

“단지 흑과 백뿐 아니라 다양한 색깔을 칠하는 것”

자유롭고 유동적인 세상에 대한 상상


■ 새로운 차원의 ‘핑크’

‘PYNK’는 여전히 공개적 언급이 금기시된 여성의 성기를 전면에 내세워 그것을 축복하는 보기 드문 노래다. 이 노래가 보다 미래적이고 급진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단순히 여성의 힘, ‘푸시 파워(pussy power)’를 긍정하는 여성지배적인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어서는 아니다. 저넬 모네이는 이 곡에서 보통 ‘여성적’인 여성, ‘걸리시함’의 상징인 색깔 ‘핑크’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 흑과 백, 구획된 다양한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통합의 힘을 발휘하며 젠더 너머를 바라보자고 말한다.

이 곡의 제목인 ‘핑크’의 철자가 조금 다른(‘PYNK’) 것은 바로 저넬 모네이가 이 노래에서 이야기하는 핑크가 기존의 핑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곡에 따르면 ‘PYNK’는 “네 안에 있는 것”이고 “모든 문의 뒤에 있는 것”이며 “발견된 파라다이스”다. 또한 “안쪽 가장 깊은 곳”이며 “숨기고 있는 비밀”이자 “숨길 수 없는 진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다. 말하자면 ‘핑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깊은 곳의 색, 남성과 여성 할 것 없이 젠더를 넘어 우리 모두를 연결시키는 색이다. 그녀는 노래한다.

“우리 모두는 단지 핑크야. 깊은 안쪽에서, 우리는 모두 그냥 핑크야(we’re all just pink/ deep inside, we’re all just pink)”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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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넬 모네이의 활동영역은 노래, 랩, 작사, 작곡, 연기를 아우른다. 많은 이들에게 영화 <문라이트>와 <히든 피겨스>에 등장하는 배우로 더 익숙한 그녀는 오래전부터 흑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며 블랙 페미니즘의 최전선에서 발언해왔다. 그녀가 퀴어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나는 안드로이드와 데이트한다”고 말했으며, 대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퀴어와 여성들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다.

2017년 1월 워싱턴 여성행진에서는 “여성은, 그리고 흑인은 가려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름이 있다”고 말했고, 한 인터뷰에선 “여성의 섹스 파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난 1월 열린 그래미상 시상식에선 “우리는 음악계에서 벌어지는 지불 불평등에 대해, 차별에 대해, 모든 종류의 성폭력에 대해, 그리고 권력의 남용에 대해 ‘때가 되었다(Time’s up)’고 말할 것이다. 우리 여성들은 문화를 빚어낼 힘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문화를 되돌려 놓을 힘도 갖고 있다. 그러니 남성과 여성이 모두 힘을 합치자”는 발언으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28세기의 신디 메이웨더

그러나 정작 저넬 모네이가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늘 입고 다니는 턱시도 정장 차림으로 이런 저런 정치적인 발언들을 할 때보다 그런 열망을 자신의 음악 속에 새로운 방식으로 녹여낼 때다.

‘PYNK’는 갑자기 튀어나온 혁신이 아니다. 저넬 모네이는 꽤 오랫동안 ‘28세기’를 노래해왔다. 2010년에 나온 그녀의 첫 정규앨범 <디 아크안드로이드>는 프리츠 랑 감독의 1927년작 SF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콘셉트 앨범이다. 그녀 자신이 2719년의 미래, 제5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도시 ‘메트로폴리스’를 음악으로 구원하려는 안드로이드 ‘신디 메이웨더’로 분해 등장한다.

부자와 고위층을 위해 대량생산된 여성 안드로이드 신디 메이웨더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사이버 반란과 인간을 사랑한 죄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쾌활하고도 관능적인 미래의 여전사인 그녀는 자유와 사랑을 억압하는 조직 ‘그레이트 디바이드’와 정면 대결하기로 한다.

앨범의 곡들, 뮤직비디오 등은 느슨하게 이 세계관 안에서 움직인다. 이를테면, 줄곧 턱시도 차림으로 자유로운 춤을 추는 ‘타이트로프’와 같은 곡의 뮤직비디오는, 춤추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는 시대에 ‘팰리스 오브 더 도그스’라는 수용소에서 체제를 전복시킬 만한 저항의 댄스 ‘타이트로프’를 몰래 추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에 나온 2013년작 <디 일렉트릭 레이디>에서도 그녀는 신디 메이웨더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PYNK’는 줄곧 도망치던 신디 메이웨더가 비로소 도착해 한동안 머무를, 믿을 만한 장소인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안드로이드의 외피를 벗고 인간 저넬 모네이로 돌아온 듯 보이지만, 그 둘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가 다른 많은 경계를 허물기를 열망하듯, 둘 사이의 경계 역시 이제 많이 부드러워져 있다. 4월27일 발매될 ‘PYNK’가 포함된 새 앨범은 그런 점에서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한다. 저넬 모네이는 새 앨범 <더티 컴퓨터>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색깔을 칠하는 데 관한 것이었다. 단지 흑과 백뿐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내 자신이 크레용 박스의 모든 색조들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경향신문

그녀가 흑인 여성들과 함께 고유의 에너지로 젠더의 경계를 허물며 때로는 ‘여성적’으로, 때로는 ‘남성적’으로 “우리에게는 핑크가 있어!(We got the pink)”라 하거나 “이 도시를 핑크색으로 물들이자”고 외칠 때,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위안을 받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 어디선가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춤을 추는 28세기의 안드로이드이자 21세기의 흑인 퀴어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PYNK’는 모든 젠더를 초월한 세계, 앞으로도 인류에게 존재할 거라고 상상키 어려운 자유롭고 유동적인 세상을 상상하게 하는 즐거운 곡이다.

<이로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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