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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책임안지는 ‘게임중독’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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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게임장애를 질병분류에 포함시키는 방안 고려”

게임중독은 질병인가 아닌가. 벌써 20년도 더 된 논쟁이다. 그만큼 질병이다 아니다를 놓고 찬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해묵은 논쟁이 최근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오는 6월로 예정된 ‘세계진단분류(ICD)’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ICD-11’ 개정에서 ‘게임장애(Gaming Disorder)’를 정신건강질환으로 포함시키는 방안을 고려하겠다고 최근 발표하면서다.

게임장애가 ICD-11에 포함될 경우 전세계적으로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는 국내 질병분류에도 게임중독이 등재될 가능성이 높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국제적으로는 물론 국내 게임업계 등도 ICD-11 개정에 거세게 반발 중이다. 논란이 커지자 통계청은 “적어도 2025년까지는 국내 질병분류에 ICD-11 기준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통계청 발표로 게임업계의 반발은 진정되는 분위기지만 논란은 여전히 남아있다. 과도한 게임으로 인한 여러 개인적·사회적 문제는 엄연하게 발생하고 있고, 이를 정부나 게임업계가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게임중독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사회적 합의를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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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발하는 게임업계 속내는

ICD-11에 게임장애를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총회에서 결정될 문제인데, 전세계 게임업계의 반발도 크고 아직까지 WHO에서 공개한 ‘게임장애 증상 및 진단 베타버전(초안)’에 대한 각국 전문가들의 의견도 받고 있기 때문에 최종결정까지는 여러 가지 변수가 남아있다.

여론의 초점은 게임장애가 질병으로 인정될지 여부에 쏠려 있지만 전문가들은 WHO가 게임장애 문제를 ‘공중보건’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데 더 의의를 두고 있다. 게임장애가 질병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대체적인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이다. 게임장애를 포괄하는 개념인 ‘인터넷 게임장애’의 경우 2013년부터 미국정신의학협회의 진단분류인 ‘DSM-5’에서 ‘정신 및 행동장애 분류’에 등재된 상태다. 이를 바탕으로 WHO도 2014년 도쿄 학술대회 등을 시작으로 매년 게임장애 문제에 대한 국제협력연구를 진행해온 게 사실이다.

실제 WHO는 ICD-11에 게임장애를 안건으로 올리면서 “최근 수십 년 동안 인터넷, 컴퓨터, 스마트폰 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과도한 이용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며 “갈수록 많은 국가에서 공중보건상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국내 한 보건의료단체 관계자는 “게임장애 문제는 국제적으로 협력하고 공공영역에서 다뤄야 할 공중보건 의제이지 게임산업이나 기타 경제이슈와 맞물려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라며 “게임업계의 반발 등은 ICD 등재과정에서 WHO가 고려할 사항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기에는 반대의견도 존재한다. 아직까지 국제적으로 게임장애의 개념이나 증상 및 진단·치료 등에 대한 명확한 연구가 진행된 바 없고, 기본적으로 게임장애를 겪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과 같은 다른 정신질환도 같이 겪는다는 점에서 게임장애만을 별도의 질병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게임중독’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는 널리 쓰이지만 의학적인 의미에서 ‘중독’이란 내성이나 금단증상 등이 규명돼야 한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는 게임중독이라는 말 대신 ‘게임과몰입’ 등과 같은 다른 단어로 쓰이고 있다.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덕현 교수는 “게임과 인터넷에 대한 연구에 불완전한 부분이 많다”며 “WHO의 ‘게임장애’ 질병 등재의 근거가 되는 논문은 현재 학계에서 반박 논문이 제기됐으며,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인 상태”라고 밝혔다.

설사 WHO에서 ICD-11에 게임장애를 넣는다 해도 당장 정부가 이를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통상 WHO에서 ICD가 개정되면 정부도 이에 맞춰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를 개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ICD를 각국 현실에 맞게 적용하거나 관련법을 개정할 필요도 있고 해서 실제 적용을 하려 해도 KCD 등재 후 4~5년 이상 시간이 걸린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KCD 개정작업을 하는 통계청의 경우 “적어도 2025년까지는 ICD-11을 KCD에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통계청 관계자는 “KCD를 5년마다 개정하는데, 2020년 예정된 개정에선 ICD-10 버전을 중심으로 개정하게 될 것”이라며 “차기 개정은 2025년인데, 2025년에 ICD-11을 KCD에 적용할지 여부는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통계청 입장에도 불구하고 ICD-11에 게임장애가 질병으로 분류되면 국내에서도 게임중독 문제를 KCD에 포함시키라는 요구가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KCD 개정과 관련된 규정은 대통령 훈령으로 정해져 있다. 대통령이 훈령을 바꾸면 현 5년마다 개정되는 KCD의 개정주기를 바꾸거나 단축하는 등의 일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경향신문

예방·치료 기금 출연으로 재정타격 우려

통계청이 “2025년까지는 계획에 없다”고 밝히면서 게임업계는 일단 한숨을 돌리는 분위기다. 게임업계는 게임중독이 KCD에 질병으로 등재되는 문제가 업계의 생존 문제와 직결돼 있다고 주장 중이다. 게임이 알코올, 마약, 도박 등과 함께 이른바 ‘4대 중독’의 대상이 될 경우 규제가 뒤따를 게 뻔하고, 규제는 산업을 더욱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게임산업은 수년째 성장이 정체돼 ‘산업이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를 사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17 게임백서>를 보면 2016년 기준 국내 게임시장 규모는 10조8945억원으로, 2015년 대비 1.6%포인트 증가하는 것에 그쳤다. 이 같은 성장도 그나마 모바일게임이 2015년 대비 24.3%포인트 성장한 덕분이었다. 게임시장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온라인게임의 경우 2015년 대비 12%포인트 매출이 하락했고, 사양길을 걷는 PC용 패키지 게임은 같은 기간 14.8%나 매출이 후퇴했다. 게임 수출도 2016년 32억7734만 달러로 전년 대비 2.0%포인트 성장에 그치면서 최근 6년간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게임산업이 침체되면서 고용인력도 갈수록 줄어 2016년 게임산업 종사자 수는 7만3993명으로 2015년(8만388명) 대비 8.0%나 줄었다.

게임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게임중독 규정으로 인한 비용지출 문제다. 정부가 KCD에 게임중독을 포함시키게 되면 게임중독 예방이나 치료 등을 이유로 게임업계가 막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업계 전반에 퍼져 있다. 아예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과거 19대 국회에서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법률안이 실제로 발의됐다. 2013년 발의돼 게임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일명 ‘신의진법(중독 예방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과 ‘손인춘법(인터넷 게임중독 예방 및 치유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다. 신의진법에서는 게임중독을 마약·도박 등과 함께 중독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어 손인춘법에서는 예방 및 치유 지원을 위해 게임업계 연매출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부담금으로 걷을 수 있게 명시했다. 두 법안은 당시 찬반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법안은 자동폐기됐다.

한 게임업체 관계자는 “KCD에 게임중독이 오르게 되면 게임업체가 중독 예방이나 치유에 돈을 내야 하는 게 실질적인 문제”라며 “매출의 1%만 돼도 1000억원이 넘는 돈인데, 성장위기에 놓인 게임업계에 부담금까지 내라는 건 가혹한 처사”라고 말했다. 이를 바라보는 게임산업 종사자들의 자조와 불만도 높다. 한 모바일게임업체 관계자는 “게임산업은 엄연한 국내 문화콘텐츠 산업의 한 축이고, 일자리 창출이나 주요 수출 콘텐츠로서도 한몫을 해오고 있다”며 “게임을 마약 등과 같은 중독 대상으로 관리하려는 시각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KCD에 게임중독을 넣으려는 배경에는 특정 의사집단의 ‘밥그릇 챙기기’ 목적이 숨어 있다는 주장도 게임업계에서 흘러나온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은 “게임중독 등재 추진세력이 이번 WHO에 의한 국제 등재에 성공하면 다시 중독법의 재추진을 시도할 것”이라며 “나아가 이 법을 근거로 게임업체로부터 치유부담금 명목으로 기금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시나리오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가는 너무도 자명하다”고 밝혔다.

문제는 게임중독이든 게임과몰입이든 과도한 게임 이용으로 인해 여러 병폐와 사회적 부작용이 발생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올 1월 대구의료원에서는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 중이던 한 청소년이 병원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붙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게임에 몰두한 부모들이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학대해 숨지게 한 사건이 잇달아 드러나 큰 파문을 일으키는 등 게임중독 문제를 단순한 이용자 개인문제로만 보기에는 갈수록 문제가 커지고 있다.

게임중독 폐해는 엄연한 현실

이에 비해 국내에서는 게임중독이나 과몰입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나 규제가 없는 탓에 피해 예방이나 치료 등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게임중독 논란이 한창 가중됐던 2011년 게임문화재단을 통해 게임과몰입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센터를 전국 5곳에 개설해 운영 중이다. 정부 추정 70만명에 달하는 인터넷·게임 중독자들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다.

게임산업진흥법의 경우 게임과몰입의 개념과 이에 대한 예방 등의 규정이 있어도 산업을 진흥하는 데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예방 등을 위한 조치 마련이나 규제는 상당 부분 업계 자율에 맡겨둔 상태다. 청소년보호법의 경우 ‘인터넷 게임 중독’에 대한 개념이 명시돼 있지만 어디까지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법 적용에 한계가 있다. 국가정보화기본법도 ‘인터넷 중독’의 개념만 규정하고 있다.

게임문제와 관련된 정부 부처도 문화체육관광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등으로 제각각 나뉘어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지적도 매년 반복돼 왔다. 특히 예방이나 치료 문제 등을 감안할 때 주무부처인 복지부도 대응에 소극적이다. 2016년 ‘정신건강종합대책’을 통해 “인터넷·게임중독 문제를 주요 중독 문제로 규정하고 질병코드 등재 추진 등을 통해 대응해나가겠다”고 밝혔던 복지부는 최근 벌어진 WHO의 게임장애 등재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주간경향>이 복지부에 문의하자 해당 관계자는 “당시 종합대책은 정부 합동으로 발표했던 것”이라며 “복지부는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 등을 다룰 뿐 게임중독의 KCD 등재 문제 등은 통계청이 결정할 일”이라고 밝혔다.

가톨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이해국 교수는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인정되지 않다보니 환자들에게 양질의 치료를 제공하거나 게임중독을 막기 위한 예방활동 등을 하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정부와 게임업계 모두 더 이상 게임중독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 WHO가 공중보건의 영역에서 게임장애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이유를 되새겨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송진식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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