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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유럽헌법 군살빼며 정부 역할 줄이는데…세계추세 모르는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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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득 10만달러시대 개헌 ②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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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가 낸 자문안을 두고 '과잉 개헌'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 기본권' 논란이다. 이는 국민이 국가에 인간다운 생활을 요구할 권리를 지칭한다. 독일 같은 선진국들은 헌법에서 사회적 기본권 조항을 축소·삭제하고 있지만 이런 추세와 다르게 대통령 개헌 자문안은 사회적 약자를 소상공인까지 확대하는 등 사회권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표됐다.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사회권은 헌법이 아닌 법률로 실체화되는 것이므로 헌법에 사회권 조항을 늘리는 것은 불필요한 이념 논쟁만 야기할 뿐이라고 진단했다.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상세한 사회적 기본권 목록이 없다.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이었던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서구의 대표적 헌법 중엔 경제질서를 명시하고 있는 예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며 "독일 헌법도 사회국가 원칙 조항을 두고 있을 뿐이지 사회권은 다 삭제했다"고 말했다. 독일 바이마르 헌법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사회권을 천명한 최초의 헌법이지만 1949년 제정된 기본법에서는 광범위하게 규정했던 사회권을 삭제했다.

이렇듯 선진국들이 사회권을 강화하기 위해 헌법에 매달리지 않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는 헌법이 아닌 법률로 보장해야 한다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헌법 조문 자체로는 실효성이 없고, 무엇보다 이 조문을 헌법에 추가한다고 해도 국민이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실제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사회권은) 일종의 장식 조항에 불과하다"며 "사회적 기본권은 '국가를 향한 기본권'이라 국가가 무엇을 해주지 않으면 사회권은 아무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최저임금을 보장해달라, 최저생활수준을 보장해달라, 일자리를 달라고 국가에 요구한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국가가 재정 투자를 해서 다 들어줘야만 하느냐는 문제가 있다"며 "헌법재판소 판례를 통해 나타나지만 국가가 반드시 다 해줘야 되는 게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하므로 구체적인 청구권의 성격이 없다"고 덧붙였다. 기본권은 재판을 통해 관철할 수 있을 때 진정 의미를 갖지만 헌법에 있는 사회권은 재판을 통해 국가에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2001년 1월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는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헌재에 제기했지만 헌재는 2002년 12월 해당 헌법 소원을 각하했다. 장애인이동권연대는 헌법 제34조('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등)를 근거로 했다. 하지만 헌재는 "장애인이 복지를 향상해야 할 국가의 의무가 다른 다양한 국가 과제에 대하여 최우선적으로 배려를 요청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헌법의 규범으로부터 '장애인을 위한 저상버스 도입'과 같은 구체적인 국가의 행위 의무를 도출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국가의 사회보장·사회복지 증진 의무를 규정한 헌법 제34조는 국가의 일반적인 의무를 뜻하는 것이지, 장애인을 위해 저상버스를 도입해야 한다는 구체적 내용이 헌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헌법 조항만으로 국가에 저상버스 도입 의무를 지우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번에 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위가 낸 자문안은 구체적 조문이 공개되지 않았으나 사회권 강화를 시사하는 부분이 많다. 국민헌법자문특위가 제시한 자문안 작성의 자세한 기본원칙을 보면 △서민·중산층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각종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사회안전망을 강화 △소상공인을 보호·육성 △사회보장 강화 △사회적 약자 보호 △일과 생활의 균형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국가의 노력 의무를 명시 △경제민주화 강화 등 관련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역시 헌법에 도입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실효성이 없을 전망이다. 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뿐만 아니라 선진국에는 상세한 사회적 기본권 목록이 없다. 우리나라는 헌법이 굉장히 상세한 편"이라며 "사회적 기본권은 헌법에 들어 있어야 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때그때 예산과 정책적 판단에 따라서 법률로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입법부나 행정부가 법을 만들 때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정도의 제한적 의미라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실체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헌법의 사회권 강화가 현재 개헌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이념적 갈등이 중심에 있다고 분석한다.

장 교수는 "우리가 지금 예민해지고 있는 것은 개헌이 보수·진보 이념의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보수·진보라고 해서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져 있지 않고 굉장히 다양한 사람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농어민단체, 소상공인, 재계, 노동조합 등 온갖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다 받아들인다면 체계가 엉망진창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은 기본적인 틀과 원칙만 세워놓고 법률로 세부적·탄력적으로 조정하는 게 맞는다"며 "집단 이기주의적 측면에서 자기들의 요구만이 가장 중요하다며 헌법에 못 박아놓자는 욕심이 너무 분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헌법은 원칙만 정하고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조항들은 법률에 맡겨야 하는데, 촛불시위와 탄핵으로 인한 에너지가 개헌 논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사회권 강화에 대해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처사"라며 "지금 있는 사회권도 구체적 권리가 아닌데 뭘 더 늘린다는 건 듣기 좋은 말로 국민을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권 관련 조문을 강화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시장경제의 활력만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불필요한 조항을 헌법에 넣으면 국회의원들에 대한 입법 요구가 강해지게 된다"며 "그러다 보면 규제만 더 강해진다"고 말했다. 결국 시장의 핵심인 '자유'가 위축된다는 뜻이다. 현 정부가 천명한 혁신성장에 위배된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조 교수는 "규제개혁 하자고 하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이런 헌법(안)을 만들었다"며 "지금 규제개혁을 한다고 해놓고 헌법에 규제적인 내용을 잔뜩 집어넣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 <용어설명>

사회적기본권(사회권) :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국가에 대해 적극적인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헌법에는 제31조 교육을 받을 권리, 제32조 근로의 권리, 제33조에서 노동 3권, 제34조에서 인간다운 생활권, 제35조에서 환경권 등 일련의 사회적 기본권이 규정돼 있다.

[김태준 기자 / 홍성용 기자 / 이윤식 기자 / 수습기자 = 윤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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