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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자본·권력에 기생, 미화하는 공공디자인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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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섭 교수가 말하는 ‘새공공디자인’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지역주민과 유리된 스타일·구호 난무

삶의 현장을 관광지로 만들고 주체들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정치 미화가 아닌 디자인의 정치로 삶에서 공공성 구현해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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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낯선 사람>(홍디자인)은 지난해 11월 열린 동명의 전시 결과물을 담은 책이다. ‘공공디자인에서 새공공디자인으로.’ 책과 전시의 모토다. 공공디자인? 새공공디자인? 관형사 ‘새’ 한 글자가 붙은 차이는 무엇일까?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의 정의를 요약하면, 공공디자인은 국가·지자체·공공기관이 조성·제작·관리하는 공공시설물 등에 공공성·심미성 향상을 위하여 디자인하는 행위·결과물이다.

오창섭(건국대 디자인학부 교수)은 기존 공공디자인이 “디자인과 공공성에 대한 빈곤한 이해를 토대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개별적 도시 미화 사업이 되어버렸다”고 비판하며 ‘새공공디자인’을 주창한 이다. 그는 “기업의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사물, 이미지, 공간에 형상을 부여해오던 바로 그 방식대로 공공재나 공공시설물을 디자인했다”고 비판한다.

공공디자인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일도 일어난다. 오창섭은 전국의 여러 마을 만들기 사업을 예로 든다. 마을 주민들은 문을 걸어 잠근다. 커튼을 내리고 철조망을 친다. 마을을 떠나는 주민도 나왔다. 벽화로 유명한 통영 동피랑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울 이화마을에선 벽화 훼손 사건도 일어났다.

오창섭은 “삶의 현장을 관광지로 만들고 일상 삶의 주체들을 관람 대상으로 만드는 실천이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전국 여러 곳에서 진행된 간판 개선 사업을 두고도 오창섭은 “시간이 흔적이 배어 있는 간판인데도, 그것을 없애면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새공공디자인은 무엇일까. 기존 디자인 운동 중 신체적 약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가치 중심의 ‘유니버설 디자인’은 새공공디자인의 참조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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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섭은 “일상에서 공공성을 실현하는 가치 중심의 디자인 실천으로서, 확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훼손되고 있는 사회적 가치, 생태적 가치, 문화적 가치, 역사적 가치 등을 회복하려는 실천적 디자인 활동”으로 정의한다. 오창섭은 이런 정의를 ‘새공공디자인 메니페스토’(9항)에도 넣었다. 메니페스토는 “그동안 정부나 공공기관에 기생하면서 사익만을 추구했던 디자이너들은 새공공디자인의 주체가 아니다”라며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고민하며 창조적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적 디자이너”를 주체로 불러낸다. 이들의 역할은 “정치의 미화가 아니라 디자인의 정치를 추구한다.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따라 그럴듯한 풍경을 연출하는 미화 활동이 아니라 삶에서 공공성을 구현하는 총체적 실천”이다.

책과 전시는 공공디자인 사업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조명하고, 새공공디자인의 가능성을 짚기 위해 마련했다. 총 16개팀의 출품작은 새공공디자인의 예를 보여준다.

디자인 회사 ‘일상의 실천’(권준호·김경철·김어진)은 리본과 철제 펜스로 제작한 ‘그런 배를 탔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2014)와 각목으로 만든 ‘살려야 한다’(2016)를 냈다. 이들은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사회에 개입하고, 목소리를 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의 방식일 수 없을까”라는 물음에서 디자인을 통해 발언하려고 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우유니게·이민경·정혜윤·이두루)의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는 ‘여남 임금 차별’ 지표를 나타내는 그래픽 디자인 작품이다. 출판사는 동명의 책도 출간했다.

슬로워크는 비영리단체, 사회적경제 조직과 공공기관에 크리에이티브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이들은 ‘로드킬 프로젝트’를 냈다. 한국도로공사가 발표한 2014년 자료를 보면, 고속도로에서 2000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로드킬을 당한다. 국도를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클 것이다. 슬로워크는 고라니·너구리·멧돼지·멧토끼·오소리·삵·족제비 등 고속도로에서 죽어가는 14종의 동물을 새긴 책갈피를 기획했다. 이들이 말하고 싶은 점은 “동물들은 길 위에서 짓밟히고, 잊혀진다”는 것이다.

‘새공공디자인’은 만들어가는 개념이다. 지금은 공공미술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오창섭은 전시 뜻에 공감하는 이들과 새공공디자인 포럼이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오창섭은 “공공디자인은 사업이 아니라 문제의식이고, 태도이며 하나의 운동이다. 이런 운동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포럼은 운동을 위한 사전 준비 단계의 실천 활동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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