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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풍운의 혁명가이자 시대 정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리더는 동기 부여와 가치 생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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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16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 기간 동안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으로서 혁명을 가치를 수출했다. 그 혁명의 기운은 당시 왕정국가에게는 위협적인 체제 전복의 가치로, 또 다른 국가에게는 프랑스 패권주의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독특하게도 국민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에게 프랑스 국민들이 걸었던 기대는 전쟁에서의 승리, 영토의 확장이 아니었다. 바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체제에 걸맞는 새로운 리더십을 원한 것이다.

▶민심과 함께 하는 진정한 소통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떤 것들일까.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초토화 한 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쳤던 위대한 장군, 프랑스의 변방 코르시카 출신의 포병 소위에서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된 입지전적인 출세와 자기 관리, 스페인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실패한 혁명가, 황후 조세핀과의 불 같은 사랑, 그리고 그의 황제 즉위에 실망한 베토벤이 교향곡 5번의 이름을 <보나파르트>에서 <영웅>으로 바꾸었다는 것 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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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폴레옹이 세계사와 프랑스 역사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 크고 뚜렷하다. 그는 18세기 프랑스에 밀어닥친 혁명의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프랑스의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다. 비록 일생이 전쟁과 투쟁 그리고 혁명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자신도 모르게 그가 행한 정치적 행위와 법률에 대한 지대한 관심 등은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현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위대함을 거론할 때 군인으로서, 황제로서의 수많은 승전과 영웅적 발자취를 들지만 정작 학자들은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에서 높이 사는 것은 법률의 정비와 프랑스라는 국가와 국민을 하나로 결집한 리더십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의 원칙을 기본으로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프랑스 민법전>)을 완성했다. 훗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의 진정한 영광은 40여 번의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나폴레옹 법전>에 있다”라고 말 할 정도로 나폴레옹은 이 <민법전>의 완성을 위해 공을 들였다. 학자들은 이 법전에 대해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양심의 자유 등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법이다. 이 법을 토대로 나폴레옹은 민사소송법, 상법, 형법 등을 제정하고 선포했다. 나폴레옹은 국가의 법치 토대를 마련한 위대한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장군, 통령, 황제를 거치면서 절대 권력을 추구한 나폴레옹이 지금도 통용될 수 있는, 민주적인 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는 개인적 욕망으로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고 유럽 지배와 조국의 영광을 좇았지만 단 한 번도 국민의 반대편에 선 적이 없는 인물이다.

나폴레옹 군대의 파죽지세와 같은 유럽 지배, 수십 번의 전투에서 신화적인 승리의 밑받침에는 당연히 프랑스 군대의 영웅적인 희생과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당시 군대, 즉 국민군의 주축 병사들은 나폴레옹에게 진심으로 충성했고 나폴레옹과 전투에 참여해 전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민들 역시 나폴레옹이 국민 중 단 1%만이 잘 먹고, 잘 사는 왕정을 타파하고 모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라고 믿고 지지했다. 이 같은 일치된 힘을 기반으로 나폴레옹은 ‘국민의 군대’ ‘무적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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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군대의 병사들의 대부분은 천민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고 살갑게 대했고 병사들에게도 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했다. 계급과 신분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병사를 대한 것이다. 이것은 병사들이 ‘능동적 충성과 용맹’을 발휘하는 큰 힘이 되었다. 그 상징적인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 제정한 ‘레종 도뇌르’ 훈장이다. 이 훈장은 나폴레옹이 칭한 ‘국민군’의 자부심이다. 위대한 혁명을 이뤄낸 프랑스의 국민과 국민군은 자유와 평등의 사상으로 무장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한 ‘자발적인 군대’였다. 이들의 마음을 지배한 자유와 평등의 사상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광과 명예를 결합해낸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노력하고 조국의 영광을 위해 분투한다면 그 명예를 조국이 알아주고 또한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는 것을 이 훈장으로 증명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 표본으로 자신을 들었다. 프랑스 변방 섬 출신 하사관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제시한 것이다. 이 부분이 나폴레옹 군대가 이룩한 승전 신화의 비밀인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과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 리더십의 핵심인 것이다.

나폴레옹은 16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 기간 동안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으로서 혁명을 가치를 수출했다. 그 혁명의 기운은 당시 유럽 왕정국가에게는 위협적인 체제 전복의 가치로, 또 다른 국가에게는 프랑스 패권주의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은 독특하게도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99.8%의 지지율. 만장일치 국민 선택에 의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에게 프랑스 국민들이 걸었던 기대는 전쟁에서의 승리, 영토의 확장이 아니었다. 바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체제에 걸 맞는 새로운 리더십을 원한 것이다. 그것에 나폴레옹은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약속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치를 자신이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국민과 군대를 이끄는데 현명하고 침착했다. 또한 자신의 행동과 명령 그리고 생각하는 것에도 책임감을 부여한 것이다. 이 같은 나폴레옹의 정직, 침착, 책임의 정신이 두드러진 리더십이 있었기에 그는 단순한 장군출신 황제, 혁명가, 쿠데타의 주역 등등의 수식어보다 지금 세상에서 ‘영웅’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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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이 신뢰를 받는 리더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나폴레옹 역시 국민과 군대의 믿음을 바탕으로 리더가 되었지만 그 리더십의 지속에서 실패했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 멸망의 기록에서 그 단초를 찾는다. 그것은 독선과 아집이다. 나폴레옹 역시 리더가 흔히 범하는 실수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국민과 군대와 직접 소통하는 형식의 통치를 통해 중간관리자, 후계자 양성에 실패했다. 완벽한 리더였던 나폴레옹은 완벽한 참모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그의 리더십이 독선과 아집으로 변질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나폴레옹 개인적인 실패와 함께 18세기 새롭게 일어난 유럽에서의 혁명의 불길을 꺼지게 했다. 나폴레옹 패망 이후 유럽과 프랑스는 반동의 시대로 돌아갔다. 왕정이 복귀되고 봉건적인 통치로 유지되는 이른바 ‘빈체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나폴레옹을 실패자로 보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였고 자신의 역할에 매우 충실했던 시대의 선구자이다. 16년간 나폴레옹과 함께한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들은 새로운 리더십 경험 후 프랑스 역사에서 자유와 평등, 조국의 영광을 기치로 내건 리더들이 탄생한 것이다. 나폴레옹,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다. 군사학, 통치학, 제국의 경영학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 민심과 함께 한 진정한 소통 리더십이다. 독일의 지성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멀리서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진군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가 본 것은 말을 타고 진군하는 ‘시대 정신’이었다.” 그는 시대의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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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없는 섬 출신, 그러나 ‘노력형 천재’

나폴레옹은 1769년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8남매의 둘째로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집안은 이탈리아의 소지주 출신. 코르시카는 본래 이탈리아의 영토였지만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항의해 파올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탄압에 파올리가 망명하자 그의 집안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성도 보나파르트라는 프랑스식으로 개명했다.

나폴레옹의 유년기는 보통의 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특별하다면 수학을 좋아하고 유난히 책을 좋아했다. 특히 나폴레옹은 <플루타크 영웅전> 같은 전기물을 좋아했다. 이 같은 나폴레옹의 독서광적 취향은 훗날 전쟁터에서도 여전했다. 나폴레옹은 수레에 가득 책을 싣고 군 막사에 서가를 마련해 책을 읽었다.

1779년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느 육군유년학교 입학한 나폴레옹은 1784년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즉 타고난 천재보다는 ‘노력하는 천재’에 가까웠다. 육군사관학교는 보통 4년의 과정이지만 나폴레옹은 불과 11개월 만에 수료했다. 졸업 시 그의 성적은 58명 중 42등.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단기간의 성취로는 대단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1785년 나폴레옹은 불과 16세의 나이에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꼬마’가 프랑스 장교가 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격동기였다. 절대 군주 태양왕 루이 14세의 통치기 이후 국가 재정이 바닥이 나 있는 상태였다. 루이 15세의 영국과의 백년전쟁, 루이 16세의 미국 독립전쟁 패전 이후 국가는 부도 일보직전이었고 국민들의 삶은 바닥이었다. 이후 삼부회를 결성해 국가 개혁을 이루려 했지만 왕정체제 하에서 민주적인 목소리는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억눌림은 반동의 힘을 키우는 양식이었다. 국민의회를 군대의 힘으로 누르던 루이 16세의 독재는 국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789년 7월14일, 프랑스 국민은 절대 권력의 상징 바스티유 감옥을 급습했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인 셈이다. 철옹성 같던 왕정은 무너졌다. 프랑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분열은 있었다. 부르주아를 주축으로 한 지롱드 당, 시민계급이 주축이 된 자코뱅 당으로 양분되었고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 당이 권력을 잡았다.

이 당시 나폴레옹은 자코뱅 당을 지지했다. 이후 혁명의 파도 속에서 관망하던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시카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마르세이유로 이주를 했다. 마르세이유는 나폴레옹 일가에게 행운의 도시였다. 마르세이유 최고의 부자 클라리 가문과 친분을 쌓은 형 조제프는 클라리 가문의 마리 줄리와 결혼했고 나폴레옹 역시 마리 줄리의 동생 데지레 클라리와 약혼을 한다. 나폴레옹의 일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기였다.

파리에서는 피의 숙청이 계속되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절대 군주였던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웠다. 루이 16세 처형은 유럽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1793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네덜란드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한다. 이에 프랑스에서도 반 로베스피에르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1794년 테르미도로의 반동 사건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했다. 그리고 총재정부를 수립했다.

나폴레옹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탕과 친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당시 총재 정부 실력자인 파울 바라스의 후원으로 석방되었고 오히려 중용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사라지자 외국에 망명해 있던 왕당파들이 반프랑스 동맹국의 지원 하에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진군했다. 이 사건이 이른바 방데메에르 13일의 폭동으로 1795년에 발생했다.

이때 나폴레옹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포병대를 지휘하던 나폴레옹은 이미 툴롱 전투에서 왕당파를 진압한 전력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최전선에 섰다. 그는 도시 한복판에서 포격전을 실시하는 놀라운 전술을 발휘해 왕당파를 격파했다. 이 공로로 나폴레옹은 전격적으로 사단장으로 승진하면서 프랑스의 권력대열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시대가 나폴레옹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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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프랑스, 국민투표로 황제 즉위

1796년 나폴레옹은 데지레와 파혼한다. 그리고 파울 바라스의 연인이었던 미망인 조세핀과 결혼한다. 프랑스는 아직도 혼란기였다. 국내는 혁명파와 왕당파의 대립이 계속되었고 이를 이용하려는 외세의 개입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연합군은 프랑스의 위협이었다. 파울 바라스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젊은 나폴레옹을 추천했다. 나폴레옹은 험준한 알프스의 산세를 잘 이용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하고 이탈리아 북부를 프랑스에 병합시켰다. 이 승전으로 나폴레옹은 그 존재감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나폴레옹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총재 정부의 실력자들은 나폴레옹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폴레옹을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영국과 인도간의 통로를 차단하라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을 파리에서 쫓아내려는 속셈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 알렉산드르 항에 상륙했다. 그 뒤 나폴레옹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나폴레옹=승리’의 공식을 만들어갔다. 이 시기부터 나폴레옹은 정치적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총재정부에 실망했다. 프랑스 혁명의 가치가 상실되기 시작한 것이다.

1799년 11월9일,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부뤼메르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총재 정부의 대안으로 통령 정부를 수립했다. 3명의 통령 중 나폴레옹은 임기 10년의 제1통령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나이 30세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권력자가 되자 유럽은 다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결단을 내렸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원정하기로 결정한 것. 그는 로마시대 한니발 이후 처음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무너뜨렸다.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는데 성공하자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역사적인 명언을 남긴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행보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내치에서도 나폴레옹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은행을 설립해 경제적 제도를 마련했고 교육의 국가 부담을 늘리는 정책도 펴나갔다. 또한 로마 교황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적인 면에서도 유화책을 폈고 무엇보다 당시 성문화 되지 않은 관습, 불문, 봉건적 제도 등을 묶어 <프랑스 민법전>을 펴냈다. 이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근대적 가치를 성문화 한 것이다. 또한 나폴레옹은 새로운 프랑스의 건설을 위해 신분, 계급, 파벌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성과로 인해 나폴레옹은 종신 통령에 취임했다.

나폴레옹의 측근들은 나폴레옹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 달콤한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1804년, 역사상 최초로 황제를 국민이 뽑는 투표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찬성 357만2329표, 반대 2569표, 찬성률은 무려 99.8%였다. 1804년 12월2일 프랑스 제국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조의 계승이 아닌 위대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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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 아집과 독선에 빠지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하나의 가치, 하나의 통치 시스템에 두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 최대의 걸림돌은 영국이었다. 나폴레옹을 영국을 직접 공격하려 했다. 도버 해협 인근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영국은 당연히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과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황제들이 직접 출전했다. 역사는 이를 ‘3황제의 회전’이라 불렀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육상에서의 승전과는 달리 해상에서는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은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트라팔가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럼에도 유럽에서의 나폴레옹 지배는 흔들리지 않았다. 역사는 어느 한 쪽에 완벽한 승리를 주지 않았다. 영국은 해군이 강했지만 유럽 본토에 상륙할 육군이 부족했고, 프랑스 육군은 천하무적이었지만 영국에 상륙할 방법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재편하면서 자신의 형 조제프를 나폴리 왕에,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라인동맹을 발족해 1000년 역사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했다. 유럽은 나폴레옹이 구상한 새로운 정신, 새로운 통치 시대를 맞은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 국왕 역시 자신의 형제를 보냈다. 나폴레옹 가문이 유럽의 왕가를 지배한 것이다.

1810년 나폴레옹은 황후 조세핀과 이혼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다. 그녀는 이듬해 훗날 로마왕이 되는 나폴레옹 2세를 낳았다. 나폴레옹은 점차 새로운 시대 정신에서 반동적이며 봉건적인 황제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출신 성분은 커다란 약점이었다.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려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 자신도 ‘출신 성분’의 커다란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코르시카 출신의 포병 장교에서 황제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정통성이 부족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국민의 지지와 국민군의 충성이 있었지만 혈통의 빈약감을 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폴레옹은 능력이 안 되는 형제, 누이들을 왕과 왕후로 만들고 자신 역시 이혼을 감행하면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위가 된다.

역사는 이 부분에서 나폴레옹 패망의 단초를 찾는다. 불행하게도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나폴레옹의 뜻과 이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졸지에 잘난 형 덕분에 왕이 되어 통치보다는 지배를, 개혁보다는 수구적인 자세, 즉 ‘왕놀음’을 즐길 뿐이었다. 왕족, 귀족, 성직자 등 기득권 세력의 탄압에 반대했던 프랑스 및 유럽의 부르주아와 국민들은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를 ‘혁명군’에서 점차 ‘점령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에게 영국 점령은 신념이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은 막강한 해상 세력을 바탕으로 유럽을 제외한 많은 국가에서 자원을 확보하고 소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륙봉쇄령으로 오히려 유럽 국가들이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가 반기를 들었다.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하지만 러시아는 죽음의 땅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추위, 풀 한 포기 남기지 않는 초토화 작전으로 나폴레옹 군대는 전투보다는 병참에서 큰 고통을 당했다.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러시아는 굴복하지 않았다.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는 처절한 응징을 당했다.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60만 대군은 불과 1만 명으로 줄어있었다.

나폴레옹의 대참패를 목격한 유럽은 일제히 반기를 들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동맹군과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또 패배했다. 무패의 영웅 신화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가 군세를 회복하려는 나폴레옹에게 50만 명의 유럽 연합군이 들이닥쳤다. 당시 나폴레옹 휘하에는 7만 명뿐이었다. 1814년 대프랑스 동맹군은 파리 외곽까지 진출했다. 나폴레옹의 충실한 참모들이 배신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역시 대세를 인정했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물러나는 조건으로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후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동맹군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부르봉 왕가를 부활했다. 루이 18세가 즉위한 것이다. 프랑스와 유럽은 혁명 전으로 돌아갔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했다. 파리에 입성한 그는 재기를 노렸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 참패를 당했다. 딱 100일 천하였다. 그는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되었다.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핍박과 조롱을 받았다. 그러다 1821년 5월5일 위암으로 사망했다. 영웅의 비참한 최후였다. 그의 시신은 20년 뒤인 1840년 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나폴레옹의 사인을 비소에 의한 독살로도 본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의 결정은 ‘유럽의 모든 시스템’을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전파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 태동하기 시작한 자유, 평등의 정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을 쟁취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역시 나폴레옹 사후 불과 20여 년 뒤 대혁명이 다시 일어나 민주적인 공화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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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격이다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웅이었다. 본래 귀족도 아니었던 그가 프랑스 제국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리더십에 비결이 있다. 나폴레옹은 국민과 국민군의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과 결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 그가 제시한 비전은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만큼 대접받을 수 있고 노력의 결과를 보상받는 사회 건설’이었다.

신분제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계급의 벽을 뚫을 수는 없다. 오로지 타고난 핏줄과 가문만이 한 인간의 일생을 좌우하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전파하려 했다. 그 역시 황제라는 봉건적 위치에 올랐지만 그것만으로 나폴레옹이 추구한 ‘시대 정신의 진정한 의미’를 폄하할 수는 없다.

나폴레옹은 리더의 조건을 스스로 규정했다. 그는 “리더는 지성과 인격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성은 풍부하나 인격이 부족한 사람은 최악의 리더다. 지성이 모자라도 인격이 풍부한 편이 낫다”고 설파했다.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는 리더의 명령은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런 리더는 단순한 명령자일뿐이다. 반면 인격을 기반으로 한 리더의 지시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팀워크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나폴레옹은 지시나 결정에 앞서 모든 것을 대비하고 준비한 리더이다. 그는 “나의 결정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검토하고 일어날 일을 예측해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끊임없이 ‘만약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고 리더의 준비된 학습을 이야기했다.

그가 이집트 원정군을 이끌 때이다. 나폴레옹은 항상 역사와 지도를 중시했다. 그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면서 현지의 기후, 문화, 지형, 종교, 생활상, 역사에 대해 엄청난 학습을 했다. 심지어 이슬람의 경전 코란까지 읽어볼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원정군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는 이집트로 간다. 그곳 사람들은 이슬람교도들이다. 그들의 신은 알라이다. 이들의 종교를 존중하라. 이들의 교리를 반박하지 말라.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도 존경심을 표해라. 이들이 우리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로서 나폴레옹은 세심한 부분까지 스스로 공부하고 이해한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명령에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또 하나 나폴레옹 리더십의 중요한 포인트는 강한 정신력이다. 그는 “전투에서의 승리는 머리수가 아니라 정신력이다. 정신력은 물리력보다 몇 배나 강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물론 나폴레옹은 이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단순히 말로 정신력을 강조하고 훈련과 강한 기강으로만 정신력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리더가 조직원의 능력을 인정하고, 조직원은 리더를 존경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솔선수범이었다. 전투에서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는 조직원의 눈에 들어온다.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리더는 자신의 권위, 명예, 승리가 최우선이 아닌 조직과 조직원의 승리와 생존을 위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기대만큼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나폴레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원대한 꿈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역사의 발자취는 매우 크다. 지금의 프랑스 인들이 나폴레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프랑스 역사에서 승전의 나팔을 드높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이 추구한 시대의 가치에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에 프랑스의 영광과 명예라는 가치를 더했다. 이후 프랑스의 후대 리더들은 이 자유, 평등이라는 개인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조국의 영광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이 점이 프랑스의 지향점이 되었고 국민들의 구심점인 것이다. 그 가치의 생산자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위키미디어, 픽사베이 인용 및 참조 <나폴레옹 리더십>(제리 마나스 저 / 정진영 옮김 / 김영사 펴냄), <니폴레옹에게서 배우는 권력의 리더십>(스테파니 존스, 조나단 고슬링 지음/ 박수성 옮김 / 시그마북스 펴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17호 (18.02.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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