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보급되며 수렁으로
SK텔레콤에 인수된 후
하드웨어 제조 일변도에서
콘텐츠 유통으로 영역 확대
최근 SM 등 엔터 3사 손 잡고
음반•음원 유통 맡기로
아이리버가 만드는 고급 오디오 브랜드 아스텔앤컨 기기들을 외국인 가족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아이리버 제공/2018-02-14(한국일보)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SK텔레콤이 왜 또?”
지난달 31일 SK텔레콤과 대형 엔터테인먼트 3사가 음악사업을 위해 손을 잡았다는 소식에 음원 유통 업계가 술렁였다. 국내 1위 음원 유통 서비스인 멜론을 운영하다 2013년 매각했던 SK텔레콤이 음악사업을 재개하는 배경에 관심이 집중됐다.
SK텔레콤과 음악 플랫폼 사업을 위해 협약을 맺은 세 회사 SMㆍJYPㆍ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엑소, 트와이스, 방탄소년단 등 정상급 아이돌 그룹을 보유하고 있어 가요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하다. 현재 세 회사의 국내 디지털 음원시장 점유율은 15% 수준이고, 음반시장 점유율은 50%에 달한다. 카카오의 로엔엔터테인먼트(멜론), KT의 지니뮤직, CJ E&M 등이 주도하고 있는 음원ㆍ음반 유통 업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합작인 셈이다.
그런데 이 합작 사업에서 최대 수혜자는 제3의 회사가 될 듯하다. 바로 MP3플레이어 제조사로 유명한 아이리버다. SK텔레콤 자회사인 아이리버는 엔터테인먼트 3사의 음원 B2B(기업 간 거래) 유통을 맡기로 했다. 대주주인 SK텔레콤과 2대 주주인 SM엔터테인먼트의 지원을 받아 정보통신기술(ICT)과 음악 콘텐츠를 결합하는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아이리버는 엔터테인먼트 3사의 콘텐츠를 멜론, 지니 등 음악 플랫폼 사업자 및 신나라, 핫트랙스 등 음반 도소매업체에 공급할 계획이다.
SK텔레콤과 협력해 휴대용 인공지능(AI) 기기 ‘누구’를 출시한 경험이 있는 아이리버는 앞으로도 모회사와 함께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최신 정보통신기술(ICT)과 음악 콘텐츠를 접목해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특히 가까운 미래에 음원 유통에 적용될 가능성이 큰 블록체인 기술이 저작권 보호와 거래 기록 투명화 등에 활용될 경우 음악 산업에 적잖은 파급력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협약은 MP3플레이어 사업 실패 후 오랫동안 침체 상태에 있던 아이리버에 새롭게 도약할 기회가 될 전망이다. 권윤구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아이리버는 3사만으로도 음반 유통에서 확고한 1위를 구축할 것”이라며 “추가적인 기획사 확보 시 향후 음원 유통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했다.
MP3플레이어 성공신화, 애플에 무너져
아이리버의 흥망성쇠는 국내 벤처기업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를 만큼 극적이었다. 세계적 기업인 소니와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경쟁할 만큼 날아올랐다가 순식간에 급전직하했다. 아이리버 신화의 주인공은 삼성전자 반도체 수출 및 마케팅 담당 이사직을 내려놓고 자본금 3억원으로 ‘레인콤’이라는 회사를 만든 양덕준 초대 대표다. 사업 초기 삼성 등에 ODM(제조자 설계생산) 방식으로 MP3플레이어 제품을 공급하던 레인콤은 2001년 ‘인터넷의 강’이라는 뜻을 지닌 자체 브랜드 아이리버를 내놓고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2000년 80억원에 불과하던 매출도 2004년 4,000억원대로 뛰어올랐다. 코스닥 시장에서도 2003년 그해 최고의 공모가인 4만7,000원을 기록하며 ‘대박’을 터트렸다.
2002년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소니, 미안해(Sorry Sony)’라는 광고 문구를 쓸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아이리버는 한때 국내 MP3플레이어 시장 70%, 해외 시장 25%를 차지할 만큼 MP3플레이어 명가로 자리 잡았다. 특히 삼각형 모양의 플래시메모리 타입 MP3플레이어 ‘프리즘’은 독특한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으로 100만대 이상 팔리며 레인콤에 황금기를 마련해줬다.
성공과 위기는 함께 찾아왔다. 애플이 기존 아이팟보다 크기가 작고 가격도 저렴한 플래시메모리 기반의 아이팟셔플, 아이팟나노를 잇달아 내놓으며 시장을 빼앗기 시작했다. 여기에 MP3플레이어와 동영상플레이어 기능을 아우른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아이리버는 점점 기억에서 잊혀졌다. 2006년 매출은 불과 2년 만에 4,000억원대에서 1,000억원대로 쪼그라들었고 435억원까지 치솟았던 영업이익도 적자로 돌아섰다. IT업계 관계자는 “아이리버는 혁신적인 도전과 디자인으로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으나 IT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를 읽지 못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며 “회사가 갑자기 성공하면 자만에 빠지고 성과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창업 멤버들 사이에서 균열이 생기기 쉬운데 아이리버 역시 이런 고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기사회생한 아이리버, 다시 침체에
2007년 양덕준 전 대표가 회사 경영에서 물러난 뒤 이명우 전 소니코리아 회장, 김군호 전 한국코닥사장, 이재우 전 보고인베스트먼트 공동대표 등이 잇따라 구원투수로 영입됐지만 침몰하는 배를 바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회사명을 레인콤에서 아이리버로 바꾼 2009년부터 5년간 적자(연결 기준)가 이어졌다. 회사를 부진의 늪에서 건져 올린 주인공은 TG삼보컴퓨터를 회생으로 이끌었던 박일환 전 대표였다. 그는 2011년 대표로 취임한 후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 내비게이션, 전자사전, 블랙박스 등 기존 제품군 외에 유아교육용 로봇, 전자책의 매출을 늘리고 고가의 고음질 휴대용 음향기기를 새롭게 내놓았다.
70만원에 달하는 고가 제품인 아스텔앤컨은 하이파이 애호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며 2014년 회사를 흑자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해 SK텔레콤이 아이리버를 인수하면서 아이리버는 본격적으로 재기하는 듯했다. 그러나 부활의 동력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고가 제품에만 집중한 아스텔앤컨은 소비자층 확대에 이르지 못했고, 회사는 2016, 2017년 또다시 2년 연속 적자의 수렁에 빠졌다.
매출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MP3플레이어와 아스텔앤컨만으로는 회사의 수익성이 개선되지 않자 SK텔레콤은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지난해 초 사임한 박 전 대표의 빈 자리를 2011년부터 아이리버 해외사업부에서 근무한 이정호 상무를 수장으로 앉혔고, 조직을 아이리버, 오디오 액세서리 브랜드 블랭크, 아스텔앤컨 등 사업 단위별로 세분화했다.
하드웨어ㆍ음악 콘텐츠로 영역 확대
SK텔레콤이 인수한 뒤 아이리버는 사업 영역을 휴대용 음향기기, 오디오, 액세서리, 생활가전 등 하드웨어 제조에서 콘텐츠 유통으로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SM엔터테인먼트 계열사인 SM모바일커뮤니케이션즈(SM MC)를 흡수 합병하고, SM재팬 자회사 SM라이프디자인컴퍼니(SM LDC)를 인수했다. SM MC는 모바일 콘텐츠 제작사이고, SM LCD는 SM 소속 가수들의 일본 팬을 대상으로 공연 및 연예인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회사다.
아이리버는 SK텔레콤과 SM엔터테인먼트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하드웨어와 콘텐츠를 결합한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18에선 SM과 합작한 브랜드 ‘아스탤앤아스파이어’의 고음질 노래방 플랫폼 에브리싱TV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양종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SK텔레콤의 AI 등 정보통신기술, SM의 콘텐츠 제작 및 연예 기획 능력, 아이리버의 음향기기 제조 역량이 모여 시너지를 창출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아이리버의 미래는 5세대(5G) 이동통신과 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가상현실(VR) 등 첨단 ICT를 활용해 음악, 영상(옥수수), 전자상거래(11번가), 모바일 내비게이션(T맵) 등 생활 서비스를 아우르려는 SK텔레콤의 ‘빅픽처’가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크게 바뀔 가능성이 크다. 아이리버 관계자는 “기존의 음향기기와 액세서리, 생활가전 등 디바이스 사업을 계속 확대해 나갈 것”이라며 “아직 명확한 그림이 그려진 건 아니지만 음악 콘텐츠 사업에도 역량을 투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