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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더,오래 웹소설] (6)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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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일러스트 김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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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과 린다를 만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며 일주일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사업차 여행을 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 도착한다고 했다. 2008년 10월 어느 날 화폐의 역사와 관련한 여러 책을 들추어 보았다. 그중 은본위제가 왜 폐지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아편전쟁 이야기를 훑어보았다. 아버지의 소개로 조지 워싱턴 대학에 갔다. 그곳에서 화폐금융론을 가르치던 존 테일러 교수님을 만났다. 쓰고 있던 짧은 논문을 마무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테일러 교수는 턱수염을 길게 기른 인자하게 생긴 분이셨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인 모습이 눈에 띄었다. 뿔테 안경을 쓴 모습에서 학문적 연륜이 상당히 느껴졌다. 교수님과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왜 은 대신에 금이 대중의 마음을 사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찌 보면 영국은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아편전쟁은 야만적인 일이었어. 참 그 전만 하더라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었는데.”

“네. 그렇죠.”

“음. 각설하고. 자네도 알다시피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 면화였지. 영국은 차 수입을 결제할 은이 부족해지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지방 무역 상인을 통해 청에 밀수출해 벌어들인 은으로 차를 수입했지.”

참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의 약육강식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했다.

중앙일보

비트코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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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청나라 농촌경제 파탄과 국가 기능의 마비를 초래했어. 은의 유출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아편을 모두 몰수해서 파기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자 전쟁이 일어났지.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중국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난징 조약을 체결했지.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발판이 되었어. 뭐 이런 건 다 알 거고.”

사실 그런 내용은 고등학교 시절 배운 이야기였다. 어제도 책에서 다시 읽어 본 내용이었다. 교수님은 그 역사를 화폐 금융의 관점에서 말씀해 주셨다.

“금과 은이 화폐의 기준으로 동시에 사용되던 금은(金銀) 본위제가 폐지된 것은 아이러니야. 1873년 천하의 악법인 ‘화폐주조법’이 통과되었어. 이 법으로 은화는 화폐 유통에서 배제되었지. 이후 금화만 유통하게 되었어. 이는 국제금융재벌이 세계 화폐 공급에 대한 절대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어. 그들은 세계의 금광채굴을 완전히 장악했거든. 그건 잉글랜드 은행 이사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모종의 조치였어.”

갑자기 어린 시절 읽은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의 원제는 ‘온스(금)의 마법사(Wizard of Ounce)’였다. 도로시라는 소녀 주인공과 그 일행의 모험을 그린 이 동화는 미국 독립 직후의 화폐 제도를 둘러싼 남북의 정치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금은(金銀) 본위제를 옹호했다. 그래서 나쁜 마녀에게 포획된 도로시가 은 구두를 신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은의 중요성을 풍자한다. 금과 은 이면에 담긴 권력 놀이와 위정자의 위선을 풍자한 내용이다. 테일러 교수에게 내가 하고 싶은 핵심을 말했다.

“교수님. 화폐는 정부 당국만 만들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최근 일련의 탈중앙화된 화폐에 대한 여러 학술 논문과 시도는 어떤 의미인가요. 국가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만든 화폐가 결국 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고 은행들도 서민을 위한다지만 수수료나 이자만 챙기면서 장사하는데 몰두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금융안정이나 은행의 건전한 산업지원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일전에 만난 톰 이야기의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양해를 구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대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이렇게 말했어. ‘중앙은행은 정치적 제약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화폐공급은 민간 발행주체들의 경쟁을 통해 자유롭게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지금 세상에서는 상당히 이상적일 수도 있어요. 권력을 잡은 자나 기득권층에서 이를 그대로 둘까? 그리고 민간에 맡겼을 때의 부작용은 없을까?”

그는 결국 신뢰의 견고한 바탕이 화폐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데 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화폐가 파급력을 넓혀가려면 사람들 사이의 입소문이나 화폐 자체가 가진 카리스마적 성질이 있어야 해. 그래야 그 매력이 권력자를 사로잡지. 정치가, 자본가, 언론계 등 힘 있는 자들이 모종의 화폐에 매료되어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대중의 환심을 산다면 그런 화폐는 날개를 다는 셈이지. 금을 생각해 보자고. 금은 실체가 있고 심미적 매력도 있어. 음. 영원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지. 하지만 금 자체의 매력이 전부는 아니야. 권력자들은 권력의 상징으로 예외 없이 금을 소유하려고 하는데, 이게 중요해. 금의 실용적, 심미적 가치를 넘어 권위적 가치가 결합되어야 금의 위상이 견고하게 되는 것이네. 그런 금과 견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새로운 화폐라는 ‘스타 탄생’이 나오는 것 아닐까.”

학술논문과 내 머릿속의 생각은 금처럼 매력이 있는가. 혹시 누군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의 무형의 데이터인 숫자에 불과하다고 비웃을지 모르겠다. 문득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거래하는 1:1의 안정된 시스템 구축이 기본적인 아이디어였다. 누구도 개입해서 거래에 간섭할 수 없는 시스템에 사용되는 암호화된 가상화폐의 탄생, 그런 화폐를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해서는 개략적인 틀은 다져 놓았다. 희소성과 강력한 믿음을 어떻게 그 시스템에 불어 넣는가가 관건이었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새로운 스타탄생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교수와 헤어져 교정을 빠져 나온 후 나는 도서관에 들러 하던 작업을 마무리 하며 짧은 보고서를 만든다. 내 머릿속의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을 성급하게 하는 측면이 있으나 그래야 무언가를 이룬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출현시켜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니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10월 31일 동부 시간 오후 2시 10분. 암호학 전문가와 관련자 수백명에게 일본식 익명인 '사토시 나카모토'란 이름으로 이메일 한 통을 보냈다. 이메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나는 신뢰할 만한 새로운 전자화폐 시스템을 연구해보고 있습니다. 제3자 중개인이 전혀 필요 없는, 완전히 당사자 간 1:1로 운영되는 형식입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면 나의 9쪽 짜리 보고서를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나의 이름은 사토시 나카모토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컴퓨터 용어를 따서 화폐의 이름을 비트코인이라고 붙여 봅니다. 그 화폐가 인기를 얻기를 원합니다. 내 보고서 이름은 'Bitcoin : A Peer-to Peer Electronic Cash System (비트코인, 개인 간 전자화폐 시스템)'입니다.”

보고서에 비트코인의 토대와 기본원칙을 설명했다. 그 속에는 개인 간 전자거래의 작동원리와 금융기관의 필요성 상실이 담겨 있다. 수식을 사용하여 암호화의 원리를 설명하였고 중앙기관의 개입이 없는 신뢰인증 네트워크가 얼마나 신뢰를 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비트코인을 통해 개인 간 결제에서 중개인의 개입 없이도 중복으로 전자 결제 대금이 지불 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내가 일본인 이름을 사용한 것은 내 어머니 영향도 있었고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논문을 실은 멧츠다우드 온라인 암호학 커뮤니티는 오픈 소스이다. 누구나 익명으로 자료를 게시할 수 있었기에 누군가가 내 신분을 밝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톰의 주선으로 릭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릭과 린다는 결혼한지도 꽤 되었는데 아이는 없었다.

“오. 잘 생긴 빌, 너,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천재가 이 누추한 곳을 찾아오다니. 나랑 린다는 결혼해서 이렇게 살아. 요즘 세상이 말이 아니지. 우리 집 소식 들었지. 에고, 내가 돈 벌어 반드시 우리 부모님 집을 찾아 올 거야.”

다부진 체격의 릭은 고등학교 다닐 때도 허풍 끼가 상당히 있었다. 린다는 약간 살이 쪄 보였으나 청순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단발머리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소녀 같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릭이 그녀에게 나하고 포옹이라도 한번 하라고 부추겼다. 우리는 가벼운 포옹을 하였다. 린다와 나의 눈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는 듯 수줍어하며 다과를 차렸다. 그녀와 내가 철부지 애정 행각을 한 것은 젊은 혈기에서였다. 나는 그냥 그녀를 육체적으로 탐닉한 것이었다. 반대로 그녀는 나를 진정으로 좋아했었다. 내가 그녀와 관계를 마지막으로 맺은 것은 그녀 아버지의 차안이었다. 그녀는 아버지 몰래 교외로 차를 가져 와 어디론가 향했고 어석한 곳에서 우리는 젊은 혈기를 소진했다. 그녀는 사랑행위를 하며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애원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휴지로 뒷정리를 하며 그렇다고 실없이 말했다. 대학을 타 지역으로 갔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녀를 철저히 외면했다. 내겐 상당히 많은 여자가 있었고 그녀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여자 저 여자와 사랑행각을 하던 나는 아니타를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것이다. 애초에 린다를 단 한 번도 여자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중에도 없었는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남의 아내이니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릭 역시 우리의 관계를 몰랐다. 톰만이 추측을 할 뿐이었는데 그런 것에 괘의치 않았다. 릭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너를 찾은 것은 네 학위 논문을 본 것 때문이야. 블록체인에 대한 것.”

“응. 그런데 왜?”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들과 블록체인 연구 모임의 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게 내 계획서야. 너에게는 아주 쉬운 것일 거야. 나 역시 많은 연구를 했는데 실제 알고리즘과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이게 본격적인 블록체인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고 네 명성에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내가 기대하는 건 비트코인이라는 암호화 가상화폐야. 나는 새로운 화폐의 탄생을 보고 싶어.”

“구미가 당기는데.”

“그래? 블록체인 기술로 전자 결제 시스템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거래 내역을 모두 확인하면서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꿈꾸고 있어. 중앙은행이나 그 어떤 금융기관의 도움 없이 말이야. 익명성의 원칙은 보장이 되어야 해. 누구도 비트코인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이 거래의 진실성만 담보되어야 해. 거래내역에 어떤 규칙을 적용하면 좋겠어.”

“그래야 신뢰가 가지. 이때까지 선행연구들은 모두 실패했지. 신뢰를 못 얻었기 때문이야.”

“금처럼 비트코인을 채굴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비트코인은 이 시스템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고에 대한 대가로 주는 거야. 몇 개의 논문에 거래를 연결하는 방안으로 수학문제인 해시 연산을 푸는 방법이 있더라. 그런데 그게 완전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아. 네 논문도 봤어. 상당히 발전된 이야기더라. 나는 널 믿어. 네가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고 해서 찾아 온 거야.”

릭은 나의 설명을 자세히 들은 후 말했다.

“잘 알았어. 거래정보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네트워크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검증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핵심이네. 그런데 그런 거래 장부를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가 관건이겠구나. 해시연산 암호작업을 좀 더 정교하게 하여 거래를 ‘블록’으로 만들어 이를 연결하는 것을 생각해 볼게.”

그는 특별한 암호화 원리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결국 비트코인은 이 시스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주는 유인책인데. 금광을 캐듯이 비트코인을 캔다. 멋진 생각이야. 알았어. 암호학은 내 전공이니 너랑 파트너가 되어 일해보자. 아 린다도 이 분야 전문가야. 스타탄생을 보자고. 몇 개월 작업이 걸릴지는 모르겠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우선순위를 여기에 두마. 기대해 봐.”

그가 어떻게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을 만들지 모르겠으나 믿기로 했다. 나는 비트코인의 수가 한정되어야 희소성을 갖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추가적인 배경 설명을 해주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만나기로 하고 전화번호를 적어 테이블에 놓았다.

“또 보자.”

릭의 집을 나오면서 내가 꿈꾸는 비트코인이라는 유토피아가 완성될 수 있을 지에 대한 희망을 꿈꾸니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 그의 집을 나오며 가볍게 포옹을 했다. 오랜만에 린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거리를 바라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낙엽을 쓸고 비닐봉지에 일일이 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건 노동이었지만 보람이기도 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했다. 지는 것과 맞이하는 것 사이에서 갖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내일. 낙엽을 치워야지.”

다음 날 낙엽을 치우고 잔디를 깎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을 향하였다. 모퉁이를 도는데 어머니가 보인다. 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급히 차를 돌렸다. 아니타였다.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급하게 차를 몰아 언덕을 넘어 어디론가 멀리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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