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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대중문화 거꾸로 보기] 배우도 겨울이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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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드디어 매서운 추위가 시작됐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으로 손은 얼어붙고 얼굴은 감각이 없어질 정도다.

만약 촬영이라도 있었다면 펑크 내고 도망갔을 듯싶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사실 드라마 촬영은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한파특보가 오든, 눈이 펑펑 내려 차량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대설주의보가 오든, 바람이 무섭게 불어오는 강풍주의보가 오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방영돼야 하기 때문에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촬영을 강행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요즘 같은 날씨에 야외 촬영을 할 때면 배우들은 개개인의 노하우를 살려 한파 대비용 무장을 하곤 한다. 유독 겨울 촬영이 많았던 필자 또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몇 가지 아이템을 활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먼저 최대한 티가 안 나면서 가장 보온 효과가 높을 만한 신체 부위를 골라 덕지덕지 핫팩을 붙여 나간다. 목덜미, 아랫배, 등 쪽에는 한두 개씩 붙이고 허벅지에는 목도리 두르듯 에워싸서 여러 개를 붙인다.

그다음 양쪽 주머니에는 손난로를 챙기고 신발은 한 치수 큰 것을 준비해서 밑창에 핫팩을 두둑이 끼워 넣는다.

마지막으로 촬영용 의상 위에 큰 패딩 점퍼를 걸치고 허리엔 담요를 두른 채 촬영장에 나선다. 그리고 큐 사인이 떨어지기 바로 전에 외투와 담요를 부리나케 벗어던지는 요령까지 터득하면 준비 완료였다.

사극 촬영으로 보온성이 하나도 없는 비단 재질의 한복을 입어야 할 때면 스키 바지는 필수 아이템이 된다. 내복과 두꺼운 기모 티셔츠는 저고리 깃에 맞춰 브이 자로 잘라 입고, 페티코트 덕분에 한껏 부풀어 오른 치마 속에는 내복, 기모 바지, 스키 바지를 3단 콤보로 겹쳐 착용해 한파 대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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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옷을 너무 껴입어 바지 지퍼 열기가 어려워져 화장실 가기가 힘들기도 했지만, 장시간 계속되는 촬영 속에서 추위를 견디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만 했다.

너무 춥다 보니 배에 붙인 핫팩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촬영하다가 배에 경미한 화상을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입이 얼어서 대사 발음이 안 되길래 낚시용 미니 난로에 얼굴을 대고 있었는데, 너무 추워서 난로를 들고 있던 소매에 불이 붙은 줄도 몰라 외투 겉감이 홀라당 타버린 경험도 있다.

가끔 같이 촬영하던 남자 파트너가 조용히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손난로를 꺼내 줄 때면 백마 탄 왕자님보다 더 멋져 보이곤 하는 로맨틱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촬영 중간에 컵라면이라도 하나 쥐어주면 인생 최고의 따스한 순간으로 느껴졌다. 뜨끈한 국물 한 모금과 얇은 면발 한 가닥 한 가닥은 어떤 값진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맛났다.

이렇게 애써서 찍은 장면일지라도 방송으로 보면 추위의 흔적이 하나도 없어 가끔은 억울함이 몰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생하며 찍은 장면들이 시청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때면 추위의 노고가 금세 가셨다.

고된 겨울 촬영에 얽힌 수많은 추억을 되뇌다 보면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TV를 보며 이야기꽃을 피워나가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함께 웃고 떠들던 그때에는 TV가 가족 간의 대화를 이어나가게 해 주는 매개체로서 큰 역할을 하곤 했다. 이제는 각자 방에서 휴대폰으로, 텔레비전으로, 컴퓨터로 개인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대가 됐지만 말이다.

다양한 매체와 채널을 개인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스마트한 대중매체의 모습도 보기 좋지만, 가족과의 소통을 열어줬던 아날로그적 창구의 역할도 꾸준히 계속되길 바라본다.

[이인혜 경성대 교수·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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