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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이상훈의 한국유사]독도, 또 다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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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에 독도에 상륙해 표주 설치, 분노한 한국 경찰 발포도

아시아경제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1950년 6월25일에 시작된 전쟁은 3년간 한반도를 집어삼켰다.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기 한 달 전 동쪽 바다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광복 이후 1953년 5월부터 일본 선박들의 독도 출항이 시작됐다. 일본 해상보안청의 자료 분석(박병섭ㆍ2014)에 따르면, 해상보안청 산하 제8관구 해상보안본부는 1953년 6월 '다케시마(竹島) 순시'를 시작했다. 6월20일 시마네현(島根縣) 국경본부, 마쓰에(松江) 입국관리사무소, 시마네현청, 마쓰에 지방검찰청 등과 긴밀한 협의를 거쳤다. 국경본부에서는 한국어 통역자를 준비했고, 시마네현청에서는 표주(標柱)와 팻말 제작을 담당했다.

일본은 순시선으로 '구즈류'와 '노시로'를 파견하기로 했다. 순시선에는 시마네현 직원 두 명, 경찰관 세 명, 입국관리사무소 직원 두 명이 함께 승선했다. 순시선은 6월22일 오후 4시30분 돗토리현(鳥取縣) 사카이(境)를 출발해 23일 오전 5시15분 독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강한 바람으로 독도 상륙은 실패했다.

6월26일 순시선 구즈류와 '오키'는 오후 6시 오키도(隱岐島)를 출발해 27일 오전 3시30분 독도에 도착했다. 오전 5시55분 보안관 스물다섯 명, 경찰관 세 명, 시마네현 직원 두 명 총 서른 명이 보트를 타고 독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독도에서 어로하던 한국인 여섯 명을 심문했다. 주소, 이름, 연령, 경력, 어업 종류, 어획량, 어업 동기 등을 기록했다. 개인별로 답변을 기록하고 손도장을 받은 다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독도는 일본 영토이므로 속히 퇴거하도록 명령했다.

일본 시마네현에서 미리 준비해 온 영토 표주(標柱) 두 개와 팻말 두 개를 독도의 동도에 설치했다. 표주에는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고 돼 있었다. 팻말에는 '주의. 다케시마 주위 500m 이내는 제1종 공동어업권이 설정돼 있으므로 무단 채취ㆍ포획을 금함. 시마네현'이라고 일본어로 쓰여 있었다. 또 다른 팻말에는 '주의. 일본국민 및 정당한 수속을 거친 외국인 이외는 일본국 정부의 허가 없이 영해 내의 출입을 금함'이라고 돼 있었다.

일본 순시선의 행동이 알려지자 한국에서는 여론이 들끓었다. 울릉도 경찰은 7월3일 일본이 설치한 표주를 철거했다. 정부는 해군 함정 파견을 결정했고, 국회와 경북도의회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강력히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해군 함정이 파견됐다는 정보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은 순시선 '헤쿠라'를 다시 독도로 파견했다.

일본 순시선 헤쿠라가 7월11일 오후 8시에 돗토리현 사카이를 출발해 12일 오전 5시30분 독도에 도착했다. 이때 독도에는 이미 한국 경찰이 도착해 있었다. 오전 6시15분 울릉도 경찰 최헌식 경사와 울릉중학교 교사 두 명이 헤쿠라에 승선해 회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서로의 견해 차이로 회담은 결렬됐다.

한국 측은 배에서 내렸고 헤쿠라는 독도를 곧장 떠나지 않고 유유히 섬을 일주했다. 오전 8시25분 헤쿠라가 다시 독도의 서도로 돌아오자 격분한 경찰관들이 발포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헤쿠라는 오전 8시35분 독도를 떠나 사카이를 향해 출발했다.

헤쿠라 총격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제8관구 해상보안본부는 총격 현장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순시선을 독도로 파견했다. 8월3일 독도의 서도에 상륙해 소총탄 등을 수집했고, 철거된 영토 표주의 흔적을 확인했다. 8월7일 헤쿠라는 다시 독도로 파견됐고, 동도와 서도에 두 번째 영토 표주를 세우고 돌아갔다. 9월17일 울릉도 경찰은 일본의 영토 표주를 확인하고 다시 제거했다.

9월23일 일본 돗토리현의 수산시험선 '다이센'은 영토 표주가 철거된 것을 해상보안청에 보고했다. 해상보안청은 10월6일 다시 순시선 헤쿠라와 '나라가'를 파견했다. 이들은 독도에 상륙해 세 번째 영토 표주를 설치했다. 10월15일 한국산악회는 독도에 상륙해 일본의 영토 표주를 제거하고, 동도에 '독도 獨島 LIANCOURT'라고 새긴 표석을 설치했다.

10월17일 일본 순시선 나가라는 영토 표주가 철거된 것을 확인했다. 10월23일 해상보안청은 나가라와 노시로를 독도에 파견해 한국산악회가 설치한 표석을 제거하고, 다시 네 번째 영토 표주를 세웠다. 제8관구 해상보안본부는 항해가 어려운 겨울에도 매달 한두 번씩 독도 순시를 실시해 표주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이때 세워진 일본의 영토 표주는 1954년 5월18일에 철거될 때까지 반년 이상 독도에 서 있었다. 일본이 독도에 영토 표주를 세운 것은 1953년 6월27일, 8월7일, 10월6일, 10월23일 모두 네 차례다. 일본의 영토 표주가 독도에 서있던 기간은 무려 263일이었다.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한국은 평시체제로 돌아왔다. 12월23일 해양경찰대가 창설돼 독도 경비를 담당하게 됐고, 이듬해 봄부터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1954년 5월18일 해양경찰대 경비선 '칠성호'는 석공 세 명을 데리고 독도에 상륙해 일본의 영토 표주를 철거했다. 그리고 서도의 석산봉에 태극기와 '大韓民國 慶北 鬱陵郡 南面 獨島'라는 글자를 새겼다. 해양경찰대는 경비정을 한 달에 한 번씩 독도로 파견했다.

정부는 1954년 8월1일 '독도 경비 명령'을 내려 경비대 초소 건설을 지시하고, 교통부는 등대를 설치해 8월10일부터 점등했다. 그리고 8월24일 돌로 만든 새 영토 표지를 설치했다. 8월26일 독도에 경비초소가 완공되자 경사 한 명, 순경 네 명, 의경 열 명이 주둔했다. 일본의 '산인일보(山陰日報)' 1954년 10월5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독도 정상에는 무선탑 두 개가 40m 간격으로 설치되고 탑 근처에는 각각 목조가옥이 세워져 있다. 등대는 점등되고 4, 5초 만에 섬광이 한 번 있다. 오키와 나가라는 서남쪽으로부터 섬에 접근해 1.5해리 거리로 시계방향으로 일주했는데, 서남쪽 근처에 왔을 때 갑자기 무선용 기둥 근처 가옥에서 경비원 일곱 명이 나타나 옛 육군의 것으로 보이는 산포(山砲) 덮개를 열고 두 배를 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독도에 무선탑, 목조가옥, 등대 등이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산포의 존재다. 독도에 소총이 아니라 대포가 배치돼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10월10일 석간 1면에 "다케시마는 무장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실제 대포가 아니었다. 독도자위대(독도의용수비대) 정원도의 말에 따르면, 9자(2.7m)짜리 굵은 원목을 이용해 대포로 보이도록 앞에 구멍을 파서 만든 위장 나무 대포였다.

512년 6월, 신라는 우산국이 위치한 울릉도를 복속시켰다.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을 쉽게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계교를 쓰기로 했다. 나무로 사자 모형을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실었다. 울릉도에 도착한 후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울릉도는 항복했다. 나무 모형 때문에 신라에 복속했던 우산국의 후손이 다시 나무 모형으로 일본을 제압한 것이다.

일본은 독도 순시를 멈추지 않았다. 1954년 11월20일 오후 6시 순시선 오키와 헤쿠라는 오키섬을 출발해 독도로 향했다. 밤 12시가 되자 등화관제를 하며 항해등까지 껐다. 21일 오전 6시 독도에서 12해리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고, 오키는 독도 남쪽으로, 헤쿠라는 독도 북쪽으로 항해했다. 오전 6시55분 헤쿠라가 동도의 등대를 확인했는데, 갑자기 포탄이 날아들었다.

다섯 발이었다. 비록 명중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는 충격적이었다. '영남일보' 1977년 3월5일자 기사에 따르면 독도의용수비대원 서기종과 김병렬이 발포했다고 한다. 이들이 쏜 것은 박격포였다. 이들은 군대에 있을 때 박격포 사수였는데, 가늠자가 없는 박격포를 각도만으로 조정해 발사했다고 한다. 순시선이 잇따라 총격과 포격을 당하자 일본의 독도에 대한 순시가 급감했다.

1953년 5월 이후 일본의 독도 침범으로 1954년 4월 울릉군민은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울릉군과 경찰서에서 식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독도 경비를 시작했다. 1954년 11월 헤쿠라 포격사건 이후 12월31일 독도의용수비대원 아홉 명이 경찰로 특채됐다. 1955년부터 울릉경찰은 독도경비대를 상주시켜 독도 경비를 전담케 했다. 1955년 이후 일본은 더 이상 독도에 상륙할 수 없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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