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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아, 옛날이여…비대위가 일상이 된 대학 총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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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비상대책위원회가 아니라 일상대책위 아닌가요?”

지난달 6일 한국외대에서 만난 4학년 이모(23·여)씨가 이렇게 말했다. 52대 총학생회장단(총학) 선거가 무산된 직후였다. 이 대학 총학 선거는 이날까지 등록한 예비후보 선거운동본부(선본)가 없어서 무산됐다. 내년 3월 다시 치러야 한다. 재선거까지 무산될 경우 3년째 비상대책위원회(단과대 학생회장단 중심의 임시 학생회 조직) 체제가 이어진다. ‘일상대책위’ 발언이 나온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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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대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된 건 이번이 세번째다. [사진 한국외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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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후보도 안해…총학 구성 못한 대학 속출
이 대학만의 고민은 아니다. 서울시의 주요 12개 대학(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중앙대·경희대·한국외대·이화여대·숙명여대·서울여대) 중 10일 현재 연세대를 제외한 11개 대학에서 총학 선거 일정이 마무리됐다.

이 중 총학 구성이 무산된 곳은 한국외대를 포함해 3곳이다. 한양대는 투표율이 과반에 미치지 못해 4일간 연장투표를 벌였지만 결국 투표함을 열지 못했다. 경희대 역시 연장투표 끝에 투표율 50.36%로 간신히 개표에 들어갔지만, 3분의 2 이상의 찬성 득표를 얻지 못해 낙선했다. 1개 선본이 단독 출마해 득표 경쟁 자체가 없었던 대학도 8곳이었다.

선거를 마친 10개 대학의 투표율 평균은 49.86%로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못 미친다. 지난 5월 대선 투표율은 77.2%(19세 77.7%, 20대 76.1%), 지난해 4월 총선 투표율은 58.9%(19세 53.6%, 20대 52.7%)였다.

지난해 후보가 없어 56년 만에 총학이 구성되지 않은 연세대는 올해 2개 선본이 경쟁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 표차가 15표로 오차율보다 적었다. 여기에 2위 후보의 자격이 박탈돼 재선거를 치르는 중이다. 그러나 투표율이 개표 기준인 33.3%에 못 미쳐 11일까지 투표를 연장했다.

올해 비대위 체제였던 서강대·숙명여대는 연장투표 끝에 개표 기준 투표율을 간신히 넘겨 힘겹게 총학을 구성했다. 한 대학의 학생복지처장은 “학교의 주인은 학생인데, 그들의 대표인 총학 선거에 무관심한 세태가 아쉽다”고 말했다.

운동권vs비권 넘어 무관심이 대세
대학 총학은 대학가의 상징이었다. 그 기원은 1985년이다. 그 전까지는 관변 학생단체인 학도호국단이 대표 역할을 했다. 1949년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에 따라 발족한 단체였다. 국가에 대한 헌신과 애국심 함양을 목적으로 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80년 ‘서울의 봄’ 당시 총학생회가 일시 부활했지만, 전두환 정권 출범으로 다시 학도호국단이 됐다. 이후 83년 학원 자율화 조치의 연장선상에서 폐지됐고, 총학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80년대엔 총학을 중심으로 한 반(反)정부·민주화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다. 80년 한국외대 총학 선거에 출마했었던 서경교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 출마한 선본이 6~7개였다. 학도호국단이 없어지고 총학이 부활하면서 학내에도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86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가의 억압이 있었던 시절 총학생회는 사명감으로 자발적인 헌신·희생을 하는 역할이었다. 학우들의 응원이 뜨거웠던 이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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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고려대 안암캠퍼스 미디어관에 설치된 총학생회 투표소 모습. 하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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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엔 기존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운동권 학생들 간 이념 노선 차이가 총학 선거의 쟁점이었다. 각 대학의 총학은 민족해방(NL) 계열과 민중민주(PD) 계열로 양분됐다. 여러 선본이 앞다퉈 출마해 경쟁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경제난이 심화하면서 학생들의 주된 관심이 '이념'이나 '투쟁'보다는 취업으로 이동했다.

비운동권(비권) 총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게 이때부터다. 일부 대학에서는 뉴라이트 계열 극우 성향의 총학이 등장하기도 했다. 2005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윤한울(36)씨는 “당시 4개 선본이 출마했는데, 그때만 해도 ‘남북경협’과 같은 공약이 총학 선거에서 등장해 논쟁을 벌였다”고 회고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총학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올해 총학 선거처럼 1개 선본 찬반 투표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거나, 구성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학생들의 실질적인 관심이나 필요를 총학이 제대로 대변하지 못해서 나타난 현상이다”고 진단했다.

서경교 교수는 “3년째 총학 구성이 무산됐는데 학생들은 불편함을 못 느낀다고 하더라. 총학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일반 학생들이 소외되는 구조가 계속되면서 ‘그들만의 리그’가 이어지는 게 원인이다”고 분석했다.

올해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승준(27)씨는 “요즘 청년들의 각박한 삶이 총학에 대한 관심 저하로 이어지다 보니 낮은 투표율과 잦은 비대위 체제가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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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연세대 신촌캠퍼스 학생회관에 총학생회 선거 투표를 독려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하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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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현실 문제에는 결집하기도
지난해 입후보자가 없어 선거가 무산됐던 서울여대는 올해 학과 통폐합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70%에 가까운 투표율로 총학이 부활한 이유다. 이 학교 3학년 박모(22·여)씨는 “학과 통폐합 계획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늘면서 조직적인 대응의 필요성을 느끼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1996년 경희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종욱(45)씨는 “요즘 학생들이 예전보다 정치의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활발히 연대한다면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총학 간부들이 뭔가를 이끌어나가기보다 어른들이 모르는 청년들의 이슈를 자유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으면 한다”(윤한울씨) “총학이 일반 학생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소통할 수 있는 여러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윤성이 교수)는 의견도 있었다.

서영교 의원은 “총학 임원들은 학생들 속에서 아쉬운 소리도 하고, 따가운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며 “일반 학생들도 학생 대표로 헌신하려는 학우를 따뜻하게 격려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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