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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경영위기 직격탄 맞는 ‘을 중의 을’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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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엠 ‘인소싱’ 추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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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뒤숭숭해서 일이 잡히지가 않죠. 출근할 때마다 ‘왜 이런 일을 매년 겪어야 되나’ 하는 생각이 수백번 듭니다.”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일하는 하청업체 노동자 정승환씨(37·가명)는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창원공장에서는 8개 하청업체에 소속된 정씨 같은 노동자 700여명이 일한다. 그 가운데 3개월·6개월 단위로 계약한 단기직이 250여명이고, 그중 100여명은 올해 마지막 날에 일자리를 잃는다. 그들의 일자리는 원청 정규직에게로 간다. 경영위기를 맞은 한국지엠이 아웃소싱했던 업무를 다시 사내 정규직에게 돌려 인건비를 줄이는 ‘인소싱’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씨는 나머지 450여명에 속한 ‘장기직’이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일을 겪은 게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에도 창원공장은 4개 업체와의 도급계약을 갑자기 끝냈고, 300여명이 거리에 나앉을 뻔했다. 가까스로 연말에 고용승계가 이뤄졌지만, 그때 막 둘째를 낳은 정씨 가족에게 당시의 경험은 상처로 남았다.

정씨를 비롯한 비정규직들이 창원공장 식당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난 16일, 정씨의 아내는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한국지엠이 인소싱 계획을 발표하며 비정규직 해고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파업과 천막농성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는 저대로, 아빠가, 남편이 안정적이지 못하니 불안합니다.” 정씨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아내는 진작에 다른 공장 알아보라고 했어요. 저는 10년 넘게 일했는데 억울하잖아요. 아내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겠죠.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겠습니까.”

발단은 경영위기였다. 글로벌GM 산하 오펠을 인수한 프랑스 푸조시트로엥그룹(PSA)이 유럽 내 오펠공장 가동을 늘리기 위해 한국지엠에서 수입하던 물량 13만대를 유럽 공장에서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GM이 아예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도 끊이지 않는다. 회사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못 찾은 채 인소싱을 추진 중이다. 창원공장은 지난달 26일 정규직 노조에 인소싱 계획을 통보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으로 완성차 2500여대 등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이유를 댔다.

비정규직 노조는 지난해 6월부터 원청의 직접교섭을 요구하며 부분파업을 해오고 있다. 사측이 제시한 인소싱 규모는 차체 인스톨과 엔진 부문 100여개에 달한다. 이 계획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으로 번졌다. 정규직 노조가 사측 계획에 합의해주면 비정규직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정규직 노조도 할 말은 많다. 그들도 불안감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다. 정규직 노조는 장기계약직 450여명은 전원 고용을 보장하고, 단기직은 올해 12월까지의 도급계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사측으로부터 받아냈다고 했다. 정규직 노조 관계자는 “비정규직 노조에 파업 수위를 조절해달라고 몇 차례 얘기했는데, 단기직까지 고용 보장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파업으로 라인이 자꾸 멈추니 본사가 공장 물량을 줄일 것이라는 우려가 더 커졌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지엠의 물량 감소는 심각하다. 군산공장도 2013년부터 1000여명의 사내하청 비정규직 일자리를 인소싱했지만, 판매 부진 탓에 가동률은 20%대까지 떨어졌다. 부평공장의 가동률은 70% 수준이다. 정규직 노조는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씨처럼 10년 이상 일해온 하청노동자들의 박탈감은 크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불신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비정규직들은 “사측이 노노갈등을 조장한다”고 말한다. 한국지엠은 2013년과 2016년 두 차례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사내하청을 계속하다가, 비정규직들 파업을 빌미로 삼아 인소싱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조 진환 사무장은 “상시 인력이 필요한 업무에 몇 년 동안 사내하청을 써 온 지엠 측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조가 파업 중인 공정에는 원청 관리직이 투입됐다. 노조는 고용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했다. 노동계에서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는 한국지엠 인소싱 사태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노조에서 몰아낸’ 기아차노조 사태보다 더 심각하다고 본다. 결국은 정규직에게까지 이어질 구조조정의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규직 노조와 사측은 조만간 노사협의회를 열어 인소싱 방안을 확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정규직 노조 관계자는 “한국지엠의 고용 문제는 본사나 정부 차원에서 풀어야지, 개별 사업장 정규직들 손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회사는 비정규직 파업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며 도급업체에 16억원에 이르는 배상을 청구했고, 지난 15일에는 용역경비 30여명을 배치했다. 한국지엠 관계자는 “인소싱이 구조조정의 시작은 아니다”라면서도 “글로벌GM 본사의 제품 생산이나 공급 계획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회사와 정규직과 비정규 장기직·단기직들의 처지는 제각기 다르지만,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이들이 모든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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