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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오래전‘이날’]11월20일 양파가 눈물 흘린 98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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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날’]은 1957년부터 2007년까지 매 10년마다의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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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0일 98수능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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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19일 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습니다. 전국 820개 시험장에서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자녀의 좋은 성적을 기원하는 초조한 모습의 학부모들과 선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온 후배들의 응원이 교차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은 이날 수능 시험장 분위기를 그대로 담았습니다.

시각장애인 수험생들은 그해 처음 도입된 음성평가 도구를 이용해 소리로 시험을 치렀습니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 서울맹학교에서는 18명의 시각장애인들이 문제가 녹음된 테이프를 받아 귀에 이어폰을 꽃은 채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최고령 응시자인 73세 이근복옹이었습니다. 오전 7시쯤 이옹이 서울의 한 시험장에 도착하자 응원나온 학생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수능도전 네번째인 이옹은 “아들과 손자들에게서 찹쌀떡을 선물받았고 준비를 많이 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검정고시를 통해 최연소로 응시한 전남 여수의 12세 이우경군은 “대체로 쉬운 편이었다”고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양파도 수능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보던 중 위경련을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모의고사에서 300점 이상을 따 우수한 성적을 기대해온 양파는 결국 시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날 “가수활동도 중단한 채 시험준비에 매달려왔는데…”라며 울먹였다고 합니다.

대전의 한 학생은 시험장으로 뛰어가다 수험표를 분실, 발을 동동 구르다 때마침 시험장 앞에서 근무중이던 경찰이 찾아줘 무사히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는 “시간이 없어 급하게 뛰어가다 주머니에서 수험표가 떨어진 것을 몰랐다”며 “경찰관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3년공부 망칠 뻔했다”고 안도했습니다.

서해상에 내려진 폭풍주의보로 뱃길이 끊긴 전북 부안군 위도면 위도고교 3년생 7명은 전북소방본부가 제공한 헬기를 타고 시험장에 도착했습니다. 시험시작 직전에 헐레벌떡 뛰어오는 수험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서울 개포중에서 치르는 수험생 한모군은 “버스를 놓치고 택시를 탔다가 길이 막히는 바람에 늦었다”며 1교시가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서야 도착, 주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올해 수능은 포항 강진으로 1주일 미뤄져 오는 23일 치르게 됩니다. 수능 다음날 발행되는 신문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릴까요? 부디 안타까운 사연 대신 훈훈한 내용으로만 채워지길 기원합니다.

■1987년 11월 20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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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한국 선거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대권경쟁에 나섰습니다. 사회민주당의 홍숙자씨(당시 54세)였습니다. “정치 기적은 여성 대통령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제13대 대선에 출마했습니다. 홍씨는 “우리 국민의 소망은 민주화인데 민주화가 되려면 아직도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며 출마의 변을 털어놓았습니다.

1959년 외교관으로 임명된 홍씨는 뉴욕 총영사관 부영사, 유엔대표부 3등서기관 등을 지냈습니다. 퇴직 후에는 모교에서 교수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과 세계여성단체협의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여성운동에 힘썼습니다.

“남편과는 65년에 이혼했다. 보통여성이라면 남편의 부도덕한 행도을 참고 살았겠으나 나는 우리나라 가정생활의 도덕적 2중구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 양육은 내 책임으로 느껴 내가 키워온 아들은 육사 37기로 18일자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버마 아웅산 사건 때 이기백 합참의장을 연기 속에서 구해낸 부관이 내 아들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홍씨가 언급한 자랑스러운 아들은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입니다.

홍씨는 청와대 경호실 해체, 집무실 개방 등 이색 공약과 여성 각료 기용 등 과감한 여성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다투던 선거에서 그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김영삼을 지지하며 중도사퇴했죠. 13대 대선에서 김영삼은 노태우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습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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